[굿모닝 러시아] 백야(白夜)
7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밤이 없다.
풀코바 공항의 전경이다. 정면에 붉은 글씨로 20:49라는 숫자가 선명하다만 주변 날씨는 대낮 같이 밝다. 위도 약 48˚이상의 고위도 지역에서 여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이 현상을 백야(白夜)라고 한다. 통상 백야로 유명한 것은 북유럽 도시들이지만, '동유럽'이라는 그 명칭 때문에 나는 몰랐고 미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말해두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비행기로 스웨덴의 스톡홀롬 가는데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위도 상으로는 '북유럽'에 해당하는 곳이다.
주변 날씨가 밝아서 그랬는지 막 신이 나더다. 장거리 비행에서 벗어나 목적지에 도착하니 기쁘기도 했고. 티브이에서 보던 공산권 특유의 큰 모자를 둘러 쓴 공항 경비원들에게 악수를 청하거나 같이 사진을 찍자고 친한 척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시차를 계산하면 한국은 이미 새벽 3시가 넘었지만 전혀 졸리지 않았다.
가이드 북을 열심히 읽지는 않았지만 대충 어디서 숙박할 지는 결정했다.
바로 이 지하철 노선도에서 청색 라인과 녹색 라인의 교차점에 자리한 넵스키 프로스펙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중심부로 한국 서울로 치면 시청역이나 광화문 정도로 치면 될 것 같다. 내가 판단하기로 주요 관광지 대부분은 여기서 도보로 갈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다만 몇 시간 전 알마티에서 확인했을 때는 방이 텅텅 비어있었는데 내려서 숙박앱을 다시 켜보니 비어 있는 방이 많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월드컵 시즌에다가 관광으로도 성수기 아닌가...... 생각 좀 하고 살지. 당장 열시가 넘었는데 어디서 숙박할 곳이 없었다. 게다가 이국적인 페이스(가치중립적인 용례)로 짐은 잔뜩 들고서, '나 혼자 온 관광객이오.'라고 온 몸으로 웅변을 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만 러시아라는 나라는 통념과 달리 치안이 매우 좋으며(소매치기가 득실거리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외교부에서 여행 경보가 내려진 지역도 전무하다), 게다가 날씨도 대낮 같이 밝은터라 실은 밤새 이렇게 활보를 하고 다녔어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당시 내 행동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하간 그 시점에 나는 러시아가 안전하다는 사실관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숙소도 잡기 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당장 배터리를 낭비하는 소개팅 앱 부스터나 켰다. 누굴 직접 만날 생각이 있었다기보다 현지 여자들이 얼마나 좋아요를 누르나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역시 대책이 없다.
공항 밖을 나가니 재직하던 모 회사의 자동차가 참 많이도 굴러다니더라. 그걸 보니 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러시아 마케팅과 관련된 계약서 검토도 참 많이 했었는데. 닭장 같은 자리에서 시답잖은 일로 갈굼당하며 오대양 육대주에 자리한 나라들의 계약서를 골고루 검토해봤자 풍물기행을 보는 것 반만큼도 글로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근데 누군가는 내가 검토한 계약서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일로 구매했을 자동차가 거리에 굴러다니자 기분이 퍽 묘했다. 멍하니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택시를 찾는 줄 알았는지 택시기사가 내게 탑승하겠냐고 물었다.
"타크씨(такси)?"
딱 러시아로 택시는 이렇게 발음한다. 나는 손을 저었다. 러시아 대중교통을 이용해보고 싶기도 했고 짐도 많고 이 도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택시를 타는 게 맞는 선택인지 의문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가보지도 않은 나라를 혼자 여행하며 숙소도 안 잡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퍽 모순적이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서 다시 지하철을 타야 한다. 난이도는 별 5개 만점에 별 반 개 정도 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기초적인 영어도 못 하긴 한다만(중년 이상은 1, 2, 3도 영어로 말 못한다), 나 같은 길치에 넌씨눈도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당신도 여행을 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이다. 지하철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나를 전부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때만 해도 동양인 관광객이 흔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냥 내가 자기들을 동물원 곰보듯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며 쳐다보니까 따라서 나를 보았던 거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중국인도 많고 우즈벡이나 카자흐스탄에서 온 사람들도 많다.
자 금방 넵스키 프로스펙트에 무사히 도착하고 말았다. 짜잔 보아라 나도 할 수 있다.
처음 보는 거리가 참 좋더라. 눈 호강이었다. 이 도시는 그냥 지어놓은 아파트도 문화 유산처럼 생겼다. 건물을 신축하는 데 어떤 엄격한 룰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근세에 지어진 건물들이 지금까지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일까. 이것저것 찍은 사진들이 다 그냥 아파트였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네바강도 좋았다. 좋으니까 인증샷을 날리자.
비싼 비행기 티켓으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놓고 셀카봉을 안 챙겨와 팔을 뻗어 사진을 찍음. 데헷.
아마 두번째 화에 올린 비행기에서 사진이 저 별 스티커 없는 유일무이한 내 사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날 이후 러시아에서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사진이 한 장도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화에 올린 사진이 특별히 잘 나온 사진이었다기보다, 머리가 지성에다가 탈모는 없다면 머리숫이 빽빽한 편도 아니라 무광 왁스와 스프레이로 정성스럽게 정돈해주지 않으면 머리가 영 엉망이 되어서다. 근데 해외여행을 자주 안 다닌 덕분에 비행기에 스프레이를 못 들고 타는 줄 알았다(짐으로 부치면 되고 헤어류는 들고 탈 수 있는 항공사도 많다). 대용품으로 산 미스트는 한국에서 시험했을 때는 나쁘지 않았는데 정작 러시아에서 써보니 10번 중 8번은 엉망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사진이 머리를 감은지 오래 되서 기름지거나, 아니면 되도 않는 미스트로 억지로 머리를 만들려다가 떡칠이 되서 기름지거나, 여튼 길거리 거지 마냥 머리가 기름진 사진 바에 없다.
여하간 이건 잡설이고 지나가는 성당의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는 우리 동네 교회당만큼 친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 성당이다! 나중에 내부 사진도 올릴 생각이다.
크고 화려한 성당이다만 도시 한복판에 있어서 그럴까, 전기줄과 비둘기 똥, 그리고 매연에 시커멓게 그을린 느낌이 어쩐지 괴로워보였다. 그런데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에는 정갈한 교토를 좋아하지만 또 누군가는 제각각으로 무질서한 간판이 달린 서울을 더 좋아하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더 단정한 느낌의 도시는 많이 보았지만 나는 이곳이 더 좋더라. 첫 인상도 가장 좋았고 여행을 떠날 때까지도 그러했다.
여행을 원래 좋아하지도 않고, 이곳을 온 것도 인생 전환점에 그래도 한 번 가야하지 않나 싶어 억지로 온 것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퍽 운이 좋은 셈이었다.
넵스키 프로스펙트는 오랜 성당과 박물관 뿐 아니라 유흥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양한 컨셉의 클럽들과, 물담배를 할 수 있는 후카바(hookah bar)들이 뭉쳐 있다. 근데 이런 노는 곳들이 고풍스런 유럽 풍 건물에 들어가 있다. 만약 한국에서 클럽이 한옥에 우겨 들어가있다고 생각해봐라! 외국인들 눈에 얼마나 신박할지.
옷 차림이 수수한 것은 공산권 국가의 특징일까. 그래도 십년 전 방문한 중국보다는 나았다. 거기에서는 스테이지에 단체티를 입은 남자들(그것도 회사 로고가 박힌 흰 티였다)이 우루루 올라가서 춤을 추었으니까.
여하간 신나게 사람을 구경하며 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거리를 지나, 처음 마주친 호텔에 들어가 숙박했다. 다행히도 숙박앱과 달리 방은 있더라(게으름의 대가로 웃돈을 주었다).
숙소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침대에 누우니 배가 고팠다. 밥 먹으러 문을 열고 나가자 눈에 들어온 이 풍경은 아침이라고 불러야 할지 밤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구나.
이때의 벅찬 기분을 기억하기 위해 비스무레한 여러 장의 사진을 올린다.
편의점에 가는 길에,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보였다.
러시아의 길냥이들은 사람을 크게 무서워하지 않는다. 두 마리의 아깽이들이 도망도 안 가고 눈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라. 샤워도 하고, 맛있는 샌드위치도 사고, 바깥의 풍경도 시원한 공기도 모두 호젓하니 좋았다.
빵 사들고 오는 길. 뒤는 카잔 성당
이대로 빵이나 처먹고 조신히 잠이나 잤으면 좋았을텐데. 이미 한국 시간 기준으로는 아침 여섯시였다. 생체리듬 상 나는 밤을 샌 것과 다름 없었다.
근데 나는 여기서 사고를 처버리고 말았다.
다음 편 이야기는 <여행 첫날 현지 여자들한테 호구 털린 이야기>다. 동구권 현지인들에게 셋업을 당했다는 점에서 장르는 아래와 흡사.
물론 농담이다. 여전히 내 신장은 두 개고 난 멀쩡하다. 다만 지금 복기해보면 역시 상당히 위험했다.
[굿모닝 러시아] D-1 아직 한국
[굿모닝 러시아] 기내 화장실 앞에서의 소회
러시아 저도 가보고싶다고 말만하고 못갔는데 ㅠㅠ 꼭 가보고싶어요! ㅎㅎㅎ다음편도 기대되네요! 팔로우하고 가요! 소통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팔로우했습니다
소통해요~~ ^^
러시아가 안전한 나라라구요? 음...
네 10박 11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상당히 안전한 걸로 파악됩니다
푸틴이 스킨헤드들을 때려잡고 경기가 안정된 2010년 초부터의 결과물이라고 그러더군요
역시 능력자에요.
러시아는 내 집처럼 종횡무진^^
헤헷 다 안전한 나라라 가능했었지요^^; 나중에는 러시아어 배워서 다시 또 가보려고요 ㅎㅎ
풍류판관님 피드에 오랜만에 놀러왔는데 글을 상당히 재미있게 쓰시는 분이셨군요! 러시아 여행기, 유쾌합니다 ㅎㅎ
ㅎ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데헷
공산국가라서 좀 무섭기는 해도
곡 한 번 가고 싶은 곳입니다.
좋은 여행 이어가세요.
경기가 회복되고 푸틴이 2010년 이후 네오나치들을 일소한 뒤로는 치안이 좋다더군요 제가 느낀 것도 그랬습니다^^
꼭 한번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ㅎㅎ
'여행 첫날 현지 여자들한테 호구 털린 이야기'
굉장히 기대됩니다!!!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써보겠습니다^^
사진을 보니 예전 여했갔던 기억이 새록 새록 하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러시아를 다녀오신 분은 많지 않은 것 같던데 반갑습니당 ㅋㅋ
ㅎㅎㅎ 러시아가 매력이 많더라구요.
저도 가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ㅎㅎ 너무 괜찮아서 다음 달에 블라디보스톡도 한번 가볼까 생각중입니다 ^^;
ㅎㅎㅎㅎ 저도 가고 싶습니다. 추운 러시아에서 마셨던 보드카가 생각납니다.
ㅎㅎ 저는 보드카보다 아르메니아산 코냑이 참 괜찮더라고요 ^^; 이것도 한국에서는 구하기 매우 어려운 술이라 가서 잔뜩 마시고 왔네요 ㅎㅎ
ㅎㅎㅎ마셔보진 않았는데, 마셔보고 싶습니다. ^^
베데엔하라고 소비에트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공원이 모스크바에 있는데 거기 아르메니아 관이 있습니다 ^^ 나중에 가실 일이 있으면 강추드립니다
여행을 가고싶다는 맘이 불끈불끈하네요^^
ㅎㅎ 가시고 여행기도 쓰고 그러십쇼^^;;
ㅋㅋㅋㅋㅋㅋㅋ 어쩐지 너무 무탈하다 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 별 일 없이 살아돌아왔으면 무탈한거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