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의 마지막 날

in #kr6 years ago

1908년 12월 11일 신돌석의 마지막 날

날이 찹니다. 삼한사온이라는 미덕은 어디로 갔는지 이번 겨울은 초입부터 예의가 없네요...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바람 피할 집에 들어와 술 한 잔 하고 아랫목에 등 지지면 사람의 몸은 노골노골 녹아들면서 깊은 잠에 빠지게 마련이죠.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인가요. 거기서 맥베드가 왕을 죽인 뒤에 환청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이 이런 거였죠. “맥베드는 잠을 죽였다. 맥베드는 다시는 편히 잠들 수 없으리라.” 너무나도 평화롭게 맘 푹 놓고 잠자는,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왕을 죽인 죄책감의 소산이었겠죠. 1908년 12월 11일 대게 많이 나는 영덕 땅의 한 집에서 한 걸출한 인물이 비슷하게 그 안온한 잠을 끝맺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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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이라는 사람이지요. 그는 대대로 영해 고을의 아전 노릇을 하던 집에 태어났습니다. 장가를 든 다음 갓을 썼다가 양반에게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대충 그 집안을 짐작해 볼 수 있겠죠. 영해라는 고을에 주목해 보면, 조선 말기 그야말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민란을 주도했던 이필제 (이 사람도 영화 주인공으로 적격인데)라는 사람이 대규모 민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합니다. 돌석은 그의 아호 같은 거였고 태호라는 이름도 따로 있었는데 그가 의병 항쟁을 벌이면서 쌓아간 전설 속에서 우리는 신태호 아닌 신돌석을 기억하게 됩니다. 꽤 교육도 받은 것 같고 한시도 지을 만큼 소양도 있었어요. 그의 한시 하나를 들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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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땅에 누운 나무에 가로막힌 단군의 터전을 한하노라
스물일곱 남아가 이룬 것이 무엇인가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이는구나.

허동현 교수는 ‘단군의 터전’이라는 점을 들면서 그가 단순한 충군의식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즉 봉건적 충성보다는 민족적인 울분과 반외세 의식이 앞섰다는 뜻이겠죠. 사실 그게 대세여야 했을 겁니다. 갑오년의 그 수십만 농민 항쟁도 결국 봉건 통치에 대한 명확한 반대를 표하지 못했던 나라, 전국의 의병들을 기껏 모아 놨더니 의병 총대장이라는 사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총대장 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나라에서 사실 임금에 대한 충성이란 결국은 허당에 질곡 이상의 존재일 수 있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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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신돌석은 사정상 합류를 못했다지만 홍범도같은 평민 의병장은 제대로 끼워 주지도 않았고 상놈 선봉장이 양반을 능멸했다고 목을 쳐 버리는 일이 횡행하는 판이었으니 신돌석은 잔뜩 변죽만 올리고 만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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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북 북부와 강원도 남부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울진 영덕 삼척 양양 등 오늘날 7호선 국도변의 고을들, 은 그의 주무대였지요. 울진 영덕에 뭐 볼 게 있었나 하지만 이쪽 고을에 일본인 어부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고 하네요. 그때 일본인들이 대게 맛을 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돌석이 경북 영양을 점령한 뒤 태백산맥을 넘어 울진으로 쳐들어가자 일본인들이 대거 탈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도 일본인들의 동해안 진출은 꽤 활발했던 것 같아요.

을사늑약 이후 의병을 일으켰던 그는 온 가족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도 가산을 털어 아들을 도왔고 매부도 처남도 모두 신돌석 휘하의 의병에 참여해요. 의병 소리를 듣고 이를 말리러 온 영해 군수 경광국은 이렇게 말하며 탄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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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 의기를 그르다고 하랴마는 독단으로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말리러 온 것 뿐이다. 눈빛은 횃불같고 다리는 바다를 건널만 하니 참으로 장군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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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본군도 “그 어깨 힘이 대단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정말로 용력이 대단했던가봐요. 다른 의병부대가 괴멸되어 가는 동안에도 신돌석의 의병대는 재빠른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 지속적인 타격을 줍니다. 군대 해산 전의 대한제국 진위대도 신돌석을 잡으려들지만 쉽지 않았죠. 이후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신돌석은 ‘태백산 호랑이’로 용명을 떨치게 됩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지요. 1908년 그는 휘하 의병대를 해산하고 차후를 기약합니다. “지금 적의 무리들이 현상금을 걸고 내 머리를 구하고 있는데, 총탄과 화살이 퍼붓는 마당에서도 죽지 아니하였던 내가 짐승 같은 무리에게 생명을 빼앗기기보다는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서 여러 강국에 원통한 사실을 호소하여 응원을 얻음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했다고 하니 다른 이들처럼 만주로 가거나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은인자중 절치부심 몸을 피해 다니던 그는 영덕의 한 마을에 사는 친척집을 방문합니다. 외사촌이라고도 하고 고종사촌이라고도 하고 이름도 왔다 갔다 하는 김가의 집이었지요. 사촌네 와서 마음도 몸도 풀려 버린 신돌석은 술 한 잔 하고 그대로 누워 간만에 편안한 잠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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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서 말한 맥베드가 왕의 친척이었던 것처럼, 때로 친척은 원수보다도 못하죠. 이 사촌들은 곯아떨어진 신돌석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도끼를 준비합니다.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거죠. 도끼를 들고 신돌석의 가슴팍을 내리찍는데 신돌석은 가슴에 도끼를 맞고서도 벽을 부수고 도망갔다고 해요. 하지만 그 죽을 힘을 다한 용력도 돈에 눈이 어두운 이들의 도끼를 당하지 못합니다. 사촌 3형제는 인간 백정이 되어 도끼를 휘둘렀고 일본군 수백 명도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신돌석은 사촌들의 손에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 나뒹굽니다. 이 사촌들은 그 머리를 끊어서 일본군들에게 가지고 갑니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군은 “생포해야 준댔지 누가 죽여 오면 준댔냐.”고 사촌들을 하릴없이 돌려보냈다고도 합니다만 그건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아마 그들은 현상금을 받아 챙겼을 겁니다.

신돌석의 유일한 아들도 자라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일본인들이 독이 든 과자를 줬다는 전설이 있지요. 저 암살자들의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요. 글쎄요 나오지 않습니다. 장담컨대 그들은 일제 내내 떵떵거리고 살았을 것이고 그때 벌어들인 돈으로 자식들 잘 교육시켜 아마 그 3대 4대 후손들은 지금 어디선가 방귀깨나 뀌고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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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서 친일파 타령하자는 건 아닙니다. 저는 21세기에 친일파 타령하는 거 딱 질색이고 그걸 지금 청산하자는 건 혁명하자는 거보다 더 어렵다고 보니까요. 하지만 걸출한 인물 하나가 간만의 꿀같은 잠 와중에 사촌의 도끼에 머리가 까여서 짐승같은 소리 지르며 벽을 부수고 뛰어나가고, 그를 쫓아 도끼 휘두르며 따라가는 사촌들을 떠올리면 매우 스산해집니다. 그게 1908년 12월 12일이었지만..... 저는 12월 11일 마지막으로 두 다리 뻗고 잠자리에 든 신돌서의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로 그를 기억해 봅니다. 그 달디 단 잠을 그는 참혹하게 끝맺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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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인륜을 저버려야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싫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시도 떨어질 수 없는 마의 본성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싫지만... 그게 또 인간이고.... 하지만 또 누구보다 존경스러운 사람이 나오기도 하는 게 또 인간사고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