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어떤 동네
북촌 Airbnb 호스트의 일기
지난 생을 돌아보면, 나는 어이 없이 덜컥 일을 저질러 놓고 그것을 수습하고 메꾸느라 뛰어다니곤 했다. 일상의 작은 지름, 그래서 이번 달의 나와 다음 달의 나와 다다음 달의 내가 힘을 모아 갚아가자, 이런 것을 넘어선 어떤 것들. 이를테면 대책 없는 마음 털어놓기, 아련한 학고의 기억, 괴이한 자기 확신, 마음껏 허술해지기, 취기와 흥에 겨운 번호 따기,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름의 커다란 일들 앞에선 마냥 낙관주의자가 되었다. 결혼식만 해도 그렇다. 야외 결혼식을 계약한 이래 당일날에 이르기까지의 수 개월 동안, 나는 한 번도 궂은 날씨를 걱정하지 않았다. 날이 좋을거야. 그런 느낌이 들어. 걱정을 내비치는 가족들 앞에서 나는 까닭 없이 대범했다. 때는 구 월. 결혼식 날 앞뒤로 태풍이 강타했다. 고로, 예식날 하늘은 몹시 맑고 푸르렀단 이야기다. 예식 전후의 얼굴 톤이 달라질 만큼 볕이 뜨겁던 날.
그렇게 생의 크나큰 결정들 사이를 짧은 보폭으로 훅훅 뛰어 건너간 다음에야, 자잘한 고민들과 맞닥뜨린다. 나는 세상과 불화하고, 미래를 어둡게 점치며, 비관론을 맹신한다. 안락사의 법적 허용을 갈구하고, 각종 연금의 고갈을 확신하며, 아이 갖기를 두려워 한다. 그것에 한 획을 그은 것은, 올해 초에 있었던 알파고의 맹활약이었다. 한때 거북이 바둑교실의 원생이었던 자로서, 대국을 해설하는 기사들을 훑어보았으나 그것은 이미 내 영역 밖의 일. 나의 미래에 낀 먹구름이 새로이 갈피를 폈다. 인공지능이라니. 대체 이건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조악한 능력을 검토해 보고, 나름의 생존 전략을 찾고자 머리를 열심히 굴렸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지능의 한계와 벌써 만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몇 날 며칠, 아니 몇 개월을 고심한 결과 나는 애니악처럼 하나의 답을 토해내고 말았다. 답은 간단했다. 역사와 예술에 기대자. 거기에 비비면서 살아가는 게 나의 유일한 방도다. 알고리즘은 엉뚱한 곳과 연결되었다. 머리 굵어진 이래로 줄곧 염두에 두었던 문제, 영원성과 유한함에 관한 것. 그것은 나의 성장 과정과도 깊숙히 얽혀있었다. 해운대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상수동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자본이 꿈틀거리며 익숙한 장소들을 집어 삼키는 것을 너무나 많이 목도해 왔다. 동네의 스카이 라인이 달라지고, 번지르르한 무엇이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떨고, 그럼으로써 이전과 달라지는 분위기들을 몸소 느껴왔다. 술에 취해 상수동 거리를 거닐다, 애꿎은 가게들 앞에서 뻐큐를 날린 것도 여러 번이지만, 언제나 나의 뻐큐는 시시하게 움츠러 들었다.
현실적인 여러 이유를 뒤로 하고, 신혼집을 정한 가장 큰 이유는 궁궐이었다. 나는 침대 너머로 궁궐 담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 담을 따라 출퇴근을 하는 내내 늘 생각했다. 어느날 이 담벼락이 쇠파이프로 만든 비계로 둘러싸여, 낡은 모포 자락으로 휘감길 날은 없겠지. 쿵쿵거리는 쇳소리들과, 피어오르는 분진들 사이에서 갑자기 멀쑥한 모습으로 나타나,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일은 없겠지. 너무 번지르르한 까닭에, 앞에 선 이가 괜한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열오른 낯으로 집에 돌아가 주변 시세를 검색하게 만들 날은 오지 않겠지. 그 한 가지 만으로도, 나는 그 동네를 사랑했다. 아무도 손 댈 수 없고, 아무도 탐할 수 없는 공간. 희망찬 개발 가능성이 없는 곳. 예전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는 곳. 궁궐 담벼락 안, 소나무의 까치집은 영원히 까치집으로 남을 곳.
고작해야 산 하나 넘어 이사를 하고서도, 늘 마음의 한 켠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열패감에 지나치길 두려워 한 적은 있어도, 언제나 마음의 지표는 변하지 않았다. 동네의 모양이 칸칸이 자잘한 것은, 그 옛날 북촌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단위로 동을 만들었기 때문이고, 가회동이나 계동에 비해 모양이 얇고 길쭉한 것은, 옆에 범접할 수 없는 창덕궁이 자리잡은 까닭이다. 그 길다란 동을, 나는 종로구의 칠레라 불렀었다. 원서동. 창덕궁 후원의 서쪽 동네. 길을 걷다 만나는 벽돌집 모양의 기와 얹은 까페는, 조선 최초의 복싱장이며, 별 생각 없이 걷다가 마주치는 비석은 역사책 속 인물들의 생가 터임을 알리는 곳. 그리고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마을버스의 정류장 안내에 빨래터가 등장하는 동네. 청와대가 멀지 않은 까닭에, 일정 고도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고(예, 대공방어 협조구역입니다), 자리잡은 한옥은 허물 수 없도록 법적으로 정해진 동네. 유일하게 진행되는 공사는, 무려 조선 시대의 자취를 되찾고자 종묘와 창덕궁을 잇는 공사뿐인 곳. 우리는 그곳에 사는 동안, 동네 토박이 할아버지와 아는 체 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는데, 약간의 시차를 두고 흘러나오는 할아버지의 지난 이력엔 어김 없는 자랑이 스며 있었다. 내가 옛날에 무슨 학교를 나왔고, 어디를 다녀오고, 여기까진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외할아버지가 창덕궁 경비대장이었어. 여기에 이르면 그만 할 말이 없어진다. 이건 뭐 어디 갖다붙일 수도 없는 자랑인 것을. 우리 외할아버지 눈 감아, 하면 이미 눈 감으신 지 오래인 것을. 그런 무수한 날들을 거쳐, 우리는 원서동에 집을 사기로 했다. 오랜만에, 나의 낙관론이 기지개를 폈다. 마음은 벌써 북촌마님이었다. (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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