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2권(20)
제4항 전투 경과의 개요(부도 제12 참조)
(一) 경원선 방면
의정부 탈환 기도가 실패되자, 제7사단장은 제7사단 및 제2사단과 제3사단의 제22연대를 통합지휘하여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려고 창동 좌우 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 후퇴하여 오는 아군의 수용에 임하였다. 의정부를 점령한 후 적은 포천방면에 침입한 적 제3사단과 동두천 방면에 침입한 적 제4사단의 주력과 합세하여 우세한 포 지원하에 60여대의 전차와 다수의 자주포를 선두로 창동을 향하여 전진을 계속하였고 6월 27일 08:00경 아군 주저항선에 도달한지 불과 1시간 만에 피아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 후 창동방어선도 드디어 지탱치 못하게 되어 수도 서울의 운명은 더욱 긴박을 느끼게 되었다. 아군은 창동을 포기하고 적과 접촉하면서 경원가도 양측 고지를 이용하여 서울 북외인 미아리선까지 후퇴하여 이 선을 최후 저지선으로 수도 서울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비장한 각오하에 적을 저지하려 하였다. 미아리는 경원가도를 포옹(抱擁)하는 북저남고(北低南高)의 고지로 위요(圍繞: 둘러싸인)된 분지(盆地)로서 서울로 통하는 이 가도만을 폐색(閉塞)하면 적 전차의 서울 침입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아군은 전력을 경주하여 전 운명을 미아리 고지의 일전에 걸려고 하였다. 아군은 제1, 제3, 제5, 제9, 제16, 제22, 제25연대 등 서울 부근에 있던 전 병력을 이 운명의 지점에 집결하여 승승급진(乘勝急進)하는 적 전차를 향하여 육탄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적은 맹렬히 전차포와 야포로 집중사격을 가하는 동시, 60여대의 전차로써 아 진지를 압진(壓進)하고 미아리 고지를 넘어 서울 시내에 돌입하려고 최후 발악을 다하였다. 그러나 종심깊이 배치된 아 방어선은 용이하게 돌파되지 않았으며 창동선에서 후퇴중인 아군 병력은 미아리 방어선에 증강투입되어 그의 강도를 더욱 증대케 되니 적은 초조하여 전차로써 강인한 급습을 감행하여 왔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적 전차를 파괴할 능력이 없음을 지실(知悉)하면서도 57밀리 대전차포 및 각 밀리 박격포의 전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돌파 초점에 결정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였으며 최후에는 105밀리 유탄포를 평사까지 하여 최대의 저항을 도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 전차는 계속 전진하여 아 방어선 돌파를 감행하려 하였고 이에 대하여 아군은 또한 지뢰와 탄약을 안고 적 전차에 육탄돌격, 이를 폭파시키는 등 우리의 전 역량과 전 지능을 다하여 추적격멸(醜敵擊滅)에 총궐기(總蹶起)하여 혈전을 거듭하였다. 이와 같이 건열(揵烈)한 전차 대육탄전에서 적 전차 8대를 파괴하였으므로 적은 미아리선 정면으로서는 아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단념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전차 2대로 하여금 청량리 방면으로 우회하여 서울시내 안암동과 청량리간에 있는 농림시험장의 삼림을 뚫고 6월 28일 02:00 드디어 서울 시내에 돌입하였다. 이에 앞서 아군은 적이 청량리 방면으로 우회한다는 정보에 접하여 이 방면에 제8연대를 배치 경계케 하였으나 적 전차는 의외로 도로도 없는 삼림을 뚫고 서울 시내에 침입하여 전혀 병력이 엇는 시내 각처로 질주하면서 종횡무진 전차포로써 포격하는 일방 미아리 진지를 점령중인 아군의 후방을 위협하였으므로 아군은 부득이 6월 28일 02:30을 기하여 후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육군본부에서는 아군의 후퇴 상황과 적의 침입 상황을 정확히 판단치 못하고 28일 02:00경 적 전차 2대가 서울 시내에 침입함과 동시에 한강 인도교와 광장교를 폭파 절단하였다. 이로 인하여 28일 02:30 미아리 방면으로부터 후퇴하는 아군은 다수의 차량을 전부 포기하고 수개 사단이 휴대하였던 막대한 무기와 보급품을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고 각 부대는 무질서하게 분산 도하케 되었으니 청량리 근방에 있는 제8연대와 태릉 부근에 있던 육사부대는 광장리로부터 미아리 부근에 있던 부대는 마포와 서빙고에서 분산된 채 각개 도하 후퇴하였다.
(二) 경의선 방면
문산을 점령한 적 제6사단 및 제1사단의 선봉대는 6월 27일 09:00경 봉암리와 방축리 일대에 도착하여 아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였으나 보병부대는 활발한 접촉이 없었고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봉암리에 집결하였던 적 주력은 6월 28일 00:00부터 야간을 이용, 전진을 계속하여 15:30에는 고양, 벽제리 간에 출현 서울 봉일천간의 경기가도를 차단한 다음, 그 일부 병력을 아군 우측배로 공격하고 그 일부는 의정부 방면에서 전진하여 온 적과 합류하여 수색을 급습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수도 서울이 함락된 연후였다. 이와 같이 후방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완전히 적의 포위망에 빠져 전황은 극도로 불리하게 되었고, 더욱 아군의 반격에 일단 후퇴하였던 적이 재공격함에 이르러 아 제1사단 전선은 점차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아 제1사단은 18:00부터 적의 포위망을 돌파,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니 즉 봉일천선의 아 제1사단 및 제15연대의 제3대대, 제20연대의 제3대대 및 보병학교 교도대대는 일산리를 경유하여 행주에 이르러 의정부 전선에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한 제8연대 및 육사교도대대와 합류하여 한강을 도하, 철수를 완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