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Locking Up Our Own
지난번 미국 대선이 한창일 때, 호기심에 대통령 후보자 토론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보면서 조금 놀란 것이, ‘Black Lives Matter’가 꽤나 중요한 논제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미국 사회 곳곳에서 인종차별이 만연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사회에서, 저 ‘인종 차별’이라는 것이 흑인들의 생존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일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Locking Up Our Own을 다 읽은 지금, 나는 'Black Lives Matter'에 완전히 공감한다. NAACP의 2014년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전체 수감자 680만명중 34%에 해당하는 230만명이 흑인이다 [1]. 미국 사회의 인종 구성을 살펴보면 흑인 13%, 백인 64%로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감옥에 가장 많이 가는 것은 흑인이다 [2]. 흑인은 백인보다 6배 높은 확률로 감옥에 갇히며, 흑인 청년 9명중 1명이 감옥에 있다는 통계도 있다 [3]. Locking Up Our Own은 이러한 통계 뒤에 숨겨진 마약과 총, 그리고 흑인들의 피로 얼룩진 지난 수십년 간의 이야기다.
저자는 수십년간 많은 잘못된 결정들이 모여 오늘날의 거대한 감옥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안타까웠던 것은, 이러한 결정들이 흑인 지도자들의 손에 의해, 흑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뿌리 깊은 인종 차별, 가난, 마약, 범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책 제목속의 두 단어 'Our Own'은 그래서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저자는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4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오늘날 미국의 감옥이 이렇게 흑인들로 가득차기 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하나씩 살핀다. 책은 크게 Origins 파트와 Consequences 파트로 나눠져 있다. Origins 파트에서는 1970년대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세 가지 사건, 마리화나 비범죄화 실패, 총기 소지 금지 법안 통과, 흑인 경찰청장들의 등장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이어지는 Consequences 파트에서는 이후 30년간 마약과 총기에 대한 처벌이 어떻게 강화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가난하고 못 배운 흑인들에게 어떤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준다.
다음은 각 챕터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 것이다. 비루한 영어 실력으로 간신히 독해한 것이라 틀린 내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 간단히 참고만 하시기를.
Origins
대마초 비범죄화 시도 무산
1975년, 워싱턴 DC의 시의원 David Clarke는 소량의 대마초 소지에 대해 감옥에 보내는 대신 100$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한다. 당시 마리화나 소지로 체포되는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있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젊은 혹은 어린 흑인이었다. 그리고 이 한 줄의 체포 기록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멸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법안은,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커뮤니티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결국 폐기되고 만다.
매년 수천명의 젊은 흑인 남성이 고작 몇 그람의 마리화나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마리화나 소지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흑인 커뮤니티의 반응은 언뜻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흑인 커뮤니티가 1950년대부터 헤로인을 비롯한 각종 마약에 지독스럽게 시달려왔다는 저자의 설명을 읽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아들, 딸, 형제, 자매가 마약으로 부터 비롯된 강도, 강간, 살인에 의해 희생되는 것을 수십년간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 마리화나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다른 마약으로 이어지지 않는 다거나 건강에 끼치는 악영항 역시 거의 없다는 과학적 진실은, 마약이 거세게 할퀴고 지나간 상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혹시 마리화나가 우리 흑인 아이들을 다른 더 강력한 마약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흑인들을 계속 약에 취해 있게 만들려는 백인들의 음모다’와 같은 인종적인 구호도 반대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사람들은 여전히 몇 그램의 마리화나 때문에 경찰에 끌려왔고, 감옥에 갔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가난한 흑인이었다.
총기 소지 금지 법안 통과
대마초 비범죄화 시도가 무산되던 시기에, 총기 소지 금지 법안 워싱턴 시의회에서 12-1 이라는 압도적인 투표로 통과되었다. 그 배경에는 흑인 커뮤니티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는데, 그때까지 흑인들의 총기에 대한 시각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극적인 변화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1800년대 노예해방이 선언되었지만, 흑인들은 항상 백인들의 집단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경찰과 사법 시스템은 백인들의 편이었고, 국가는 흑인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흑인들의 죽음을 방관했다. 이런 상황에서 총은 백인들의 폭력으로 부터 흑인들을 지켜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1950년대 이후, 다행스럽게도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폭력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 대신, 흑인들 간의 범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흑인이 다른 흑인을 죽인 사건이 매일 같이 신문 1면을 장식했고, 범행도구는 대체로 총이었다. 엄청나게 증가한 총기 범죄는, 지금껏 총을 유일한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여겼던 흑인 커뮤니티의 시각을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강도가 쏜 총에 손자를 잃은 Richard Ware의 연설 앞에서, ‘총은 백인들로 부터 흑인을 보호할 유일한 수단이다’, ‘총기 소유 금지는 흑인을 무력하게 만들려는 백인들의 음모다’와 같은 반대의견을 힘을 잃었다.
결국 워싱턴 DC에서 총기 소유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워싱턴을 둘러싼 다른 지역에서 총기 소유는 여전히 합법이었고, 이들 지역으로 부터 총은 끊임없이 DC로 흘러들어왔다. 사람들은 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기 시작했고, 그들은 대부분 흑인이었다.
흑인 경찰관들의 등장
노예 해방 이후, 흑인 경찰관은 흑인 커뮤니티의 오랜 숙원이었다고 한다. 그 이면에는 수 십년간 쌓인 백인 경찰관의 차별적인 공권력 행사, 폭력적인 체포 방식 등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흑인들은 흑인 경찰관이야 말로 같은 흑인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흑인들을 공정하게 대해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염원 속에서 1947년 미국 최초로 7명의 흑인 경찰관이 임용된다. 흑인들 사이에서 이들은 한동안 영웅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을 시작으로 흑인 경찰관들이 꾸준히 배출되었다. 그리고 1976년, 이제는 흑인 경찰 고위직이 수십명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경찰 조직 내부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이겨내고 결국 워싱턴 경찰의 정점까지 올라간 Burtell Jefferson을 비롯한 동료 흑인 경찰관들의 이야기는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흑인 경찰관들이 담당하는 치안이 실제로 흑인 주민들에게 더 만족스러웠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흑인 비율이 높은 여러 도시에서 오히려 흑인 경찰관이 백인 경찰관 보다 더 가혹하다는 주민들이 불평이 있었다. 상당수의 흑인 경찰관이 가난한 흑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흑인 경찰관들이 흑인들의 범죄에 개인적이고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는 이야기도 소개된다. 많은 흑인들이 흑인 경찰관을 흑인들의 대표자로서 흑인들의 권리를 위해 힘써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흑인 경찰관들의 목적은 그런 거창한 대의 명분이 아닌 안정적이고 높은 소득에 있었다. 이러한 괴리속에서, 흑인 경찰관들은 흑인 범죄에 대해서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기 보다는 더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198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마약과의 전쟁’을 뒷받침하며 수 많은 흑인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Consequence
의무 형량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마약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된다는 주장이 점점 거세졌다. 워싱턴 DC의 시의원 John Ray와 앞서 소개된 Burtell Jefferson은 단순히 형량을 강화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마약 판매에 대해 최소 의무 형량 (mandatory minimum sentence)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1982년 Initive 9이라 불리는 주민 투표에 의해 실현된다.
저자가 소개하는 Tasha Willis의 사례는, 강화된 처벌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Tasha Willis는 40대 중반의 흑인 여성이다. 그녀는 직장에서 다친 상처떄문에 진통제를 복용하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결국 헤로인에까지 손을 대면서 중독자가 되었다. 그녀가 저자를 (변호사를) 찾아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복 경찰에게 10달러 어치의 헤로인을 팔다가 적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담당 검사는 유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5년형을 약속했다고 했다. 하지만 늙은 어머니를 5년 동안이나 떠나 있을 수 없었던 Willis는 저자에게 재활 치료를 이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미 감옥에도 한 번 다녀왔고, 재활 치료를 실패한 경험도 있는 Willis에게 이는 사실상 불가능이나 다름 없는 요청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담당 검사는 Willis같은 사람에게는 재활 치료가 듣지 않는다며, 이 요청을 거부한다. 이에 대한 저자의 일갈은 마약 범죄에 대해 강한 처벌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통렬하게 꼬집는다.
"How come with drug programs, we act as if one or two chances is all you should get? How come we don't treat prison the same way?"
크랙과 폭력, 그리고 경찰의 ‘유죄 추정’
미국의 가난한 흑인들은 수 십년간 마약으로 고통받아왔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1980년대에 등장한 크랙이 가져온 충격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1988년 1월 한 달 동안에만 워싱턴에서 37명이 죽었다. “The Worst Thing to Hit Us Since Slavery”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였다.
결국 전국적으로 마약과의 전쟁이 선포된다. 마약 전담반이 창설되었고, 우범지역의 길거리에서는 반헌법적인 몸 수색(stop-and-frisk)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졌다. 심지어 마약 거래에 동원된 자동차를 몰수하는 방침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앞서 소개됐던 Willis와 같은 minor sellor, individual user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벌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직업을 잃거나 학업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마리화나 소지와 같이 아주 사소한 범죄더라도 일단 유죄가 선고되면 투표, 일자리, 주거, 대학 진학 등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마약 범죄라 하더라도 그 폭력성이나 여러 다양한 배경들을 고려해서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것이 필요했지만, 그러기엔 크랙 때문에 흘린 피가 너무도 많았다. 마약 공급에 관여한 모든 사람이 피에 대한 죄값을 치뤄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설령 단순 구매자라 할지라도 마약 범죄에 자금을 공급해주는 것이나 다름 없으며, 구매자가 있었기에 공급자가 있다는 논리였다.
2천년대 들어 크랙의 유통 및 그와 관련된 범죄는 감소했다. 하지만 경찰의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인 진압 방식은 관성처럼 남아 흑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저자가 가난한 흑인 청소년을 위해 세운 학교 학생들이 그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학교는 마약 거래가 자주 일어나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그 때문에 학생들은 경찰의 강압적인 몸수색에 끊임없이 시달려야만 했다.
"How can you tell us we can be anything if they treat us like we’re nothing?"
라고 울분을 토해내는 한 학생에게, 저자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다른 형태의 '유죄 추정', 자동차 수색
1995년, Ceasefire라는 이름의 경찰 작전이 등장한다. 사소한 교통 법규 위반을 구실 삼아 지나가는 차를 세운 다음(pretext stop), 차 안을 수색해서 총기나 마약을 찾아내는 것이 이 작전의 주된 내용이었다. 얼핏 듣기에도 불법적인 경찰의 이러한 수사가 묵인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총기 범죄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여전히 많은 사람이 총 때문에 죽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불법적이었지만, 이 작전의 가장 큰 문제는 경찰이 가난한 흑인들만을 타겟으로 한다는 데 있었다. 워싱턴 DC에서 백인들의 주요 거주지는 범죄율이 낮았기 때문에 작전에서 제외됐다. 자연스럽게 가난한 흑인들이 모여사는 곳에 경찰력이 집중되었다. 흑인 남성은 백인 남성 보다,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보다 더 자주 수색 받았다. 그리고 흑인 여성의 확률은 백인 남성의 그것 보다 더 높았다. 흑인만을 노리는 경찰의 pretext stop은 사실상 백인들에게는 면죄부를 쥐어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저자가 소개하는 Sandra Dozier의 이야기는 사법 제도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찰은 창문의 tint level이 지나치게 높아 보인다는 이유로 Sandra Dozier의 자동차를 세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색에서 마리화나 두 봉지를 발견한다. 기소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이 체포기록으로 그녀는 최근에 얻은 일자리를 잃고 만다.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쳐온 그녀의 모든 인생이 단 한 건의 체포기록 때문에 통째로 부정당하고만 것이다.
Epilogue 현재
2013년이 돼서야 워싱턴 DC에서는 마리화나 소지에 대해 감옥에 보내는 대신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이 통과된다. 1975년 당시 흑인 청소년들을 위해 더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던 사람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인 흑인 남성 20명 중에 한 명이 감옥에 가 있는 현실은, 더 강한 처벌만을 주장해온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바마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사법 제도 개혁을 외치며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범죄 (non-violent offenders)에 대한 처벌 완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저자는 드라마 소프라노스를 예로 들면서, 칼이나 총을 든 범죄자까지도 개혁이 확대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고 어떤 이유로 총 혹은 칼을 손에 들게되었는지 알게된다면 지금과 같은 처벌 수위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이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자신을 칼로 위협한 Dante Highsmith의 처벌을 원치 않는 다고 말한 Thomas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올바른 결정들이 모여야만 궁극적으로 암울한 현실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치 오늘날 미국의 감옥이 수 많은 잘못된 결정으로 쌓아올려진 것 처럼 말이다.
참고자료
[1] http://www.naacp.org/criminal-justice-fact-sheet/#
[2] https://en.wikipedia.org/wiki/Statistics_of_incarcerated_African-American_males
[3] http://www.nytimes.com/2008/02/29/world/americas/29iht-29prison.105612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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