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인가 미얀마인가

in #burma7 years ago

이 나라 인물들에 대한 짤막한 글들을 쓰면서 난처했던 것은 익숙치 않은 발음표기법과 함께 당최 이곳을 버마로 부를 것인지 미얀마로 할 것인지에 대한 애매함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버마라고 불러오긴 했는데 이는 상당히 손쉬운 이유에서였다. 오래 전부터 그곳을 휘어잡은 군부가 1989년에 기존의 '버마'라는 국명 대신 '미얀마'라는 새로운 명칭을 내세운 후부터 '미얀마'라는 국명을 사용하는 것은 군부정권을 지지한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 탓이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버마'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어떠한 실제적 위험도 불러오지 않는 안온한 처지에서 미얀마 대신 버마라고 그곳을 칭하는 것이 나에게는 쿨함의 표시 이상도 이하의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그렇다고 경향신문과 같은 대한민국 언론이 2007년에 그곳을 '버마'라고 칭하기로 선언한 행위류를 평가절하 하려는 것은 아니다. 경향이 한 나라의 언론으로서 가진 영향력도 지대하거니와, 그들이 나름 장고 끝에 내린 결단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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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7.9.28 사고]

경향의 다소 비장한 (*사실 그 비장함을 비꼬고 싶진 않다. 경향의 발표가 있던 2007년은 승려들에 의해 촉발된 샤프론 민주화 항쟁이 터지고 군부가 시위자 수백 수천명을 잡아서 족치던 시절이었다) 선포에서 볼 수 있듯이, 버마파 (버마 용어를 고수하는 이들을 이렇게 불러보자)들이 내세우는 주된 논리는 단순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국민을 살육한 군부정권이 만들어낸 이름이 미얀마인 만큼, 이를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 이전에 당위가 버젓이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여기서 잠깐 국내외 버마파의 실체를 들여다 보자면, 이들은 버마/미얀마의 국내보다는 국외(태국, 북유럽 등)에서 활동하는 민주화 운동가이거나 이에 동조하는 영미권 민주 국가의 개인 및 단체들이다. 영국 언론의 경우 대다수가 버마파인데, 군부에 반대한다는 이유에 더해 영국이 그곳을 식민지로 점령하던 시절 그곳을 버마라고 불렀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마라고 부르는 습관적 이유도 있다. 민주주의 논리와 제국주의 향수의 결합이라는 불편한 조합인 셈이다.

대한민국에서 버마파의 대표적인 단체로 떠오른 경향의 2007년 선언문을 2012년 12월에 읽으며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에 찬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뭔가 뜬구름 잡는 듯한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상식 대 비상식의 대결이라고 말했던 싸움을 허무하게 져버린 탓인지, 난 버마파가 미얀마라는 국명을 거부하는 이유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상식을 외치는 것이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아니, 나는 상식적인 가치를 외치면 자신의 주장이 모두 납득될 수 있고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 줄 거라고 믿는 순진함이 싫어졌다.

사실 경향의 주장에는 당위성 이외에는 검토할 만한 세밀한 사항이 없다. 과연 미얀마라는 용어가 군부에 의해 국명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 외에 원래 무엇을 의미했는지, 실제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는 못느꼈던 것일까? 군부가 부른 이름이 미얀마라고 반대 한다면, 군부가 형식상으로나마 물러난 지금 이 나라는 버마인가 미얀마인가?

경향의 자매지인 위클리 경향도 지적했지만 버마와 미얀마는 본래 같은 뜻이었다. 다만 그곳 사람들의 대화에서는 '버마'가 주로 쓰이고 글에서는 '미얀마'가 쓰이는 경향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경향신문이 선언문에서 지적한 다수의 버마인이 그곳을 미얀마가 아닌 버마라고 표기한다는 말은 반만 옳다. 다수의 사람들이 조국을 버마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표기할 때는 미얀마라고 적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얀마라고 적고 버마라고 읽는 셈이다.

정치적으로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나는 버마파에게 미얀마파의 글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그곳을 버마라고 부르다가 최근 미얀마파로 돌아선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는 2012년 1월 사설에서 자신들이 미얀마파로 돌아선데 대해 크게 세가지 이유를 꼽고 있다.

첫째, 버마라는 용어에 점차 많은 의미가 담겨있게 되어 언론의 중립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모든 언론은 사설이나 칼럼란에서야 어떠한 정부든 비판할 자유가 있지만 중립적이어야 할 뉴스란에 '버마'라는 국명을 사용하게 된다면 이는 현재 그 나라의 정부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강하게 풍길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미얀마라는 국명이 국제적으로 예전보다 많은 공인을 받고 있다. 이미 유엔(UN), 아세안(ASEAN), 엠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 등에서 버마를 버리고 그곳을 미얀마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오바마가 얼마전 그곳에 가서 그곳 정부가 주먹을 펼치면 그 손을 잡겠다고 멋진 말을 늘어놓았을 때 '버마'가 아닌 '미얀마'라고 언급하기도 했고.

셋째, 미얀마라는 용어 자체는 군부가 아무렇게나 만든 이름이 아니다. 이는 이라와디(Irrawaddy) 계곡에서 지난 천 년 동안 살아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버마파는 예전 동료였던 FT가 동지를 배반하며 적진에 뛰어들며 남긴 세가지 이유에 답할 일이다. "미얀마로 바꿔 부르는 게 아직은 성급하다고 본다"는 식의 여일하게 안일한 논리 대신 미얀마파가 움찔할 답변을 내놓기를 기대해 본다. FT의 말대로 장미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간에 향기는 변함이 없어 상관이 없다만, 통일된 실체도 없이 그저 땅 위에 경계를 세워 만든 한 나라의 이름은 얼른 하나로 정해지는게 혼란을 최소화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