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부르는 게 무슨 기도냐고?

in #christianity7 years ago

필자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만을 간절히 부르라는 필자의 코칭에 따라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어설펐는데, 좀 하다 보니 집에서도 틈만 나면 하나님을 중얼거리며 부르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도하는 남편을 아내가 유심히 살펴보더니, 한 마디 던졌다. “하나님만을 부르는 게 무슨 기도예욧?”

필자가 오랜 삶의 방황에서 사역을 결심하고 나서는,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것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던졌다. 왜냐면 그간 20여년의 평신도시절 들어왔던 교회의 관행들이 아무런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는 성경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리고 찾아낸 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성경의 말씀이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4:29)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잠8:17)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중략... 하늘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9~13) 등의 말씀 외에도 이와 비슷한 투의 말씀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아닌가?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요청을 하든지 간구를 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성경적인 기도방식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다. 기도시간이 되면 경쟁하듯이 큰소리로 외치거나 방언을 유창하게 하면 기도를 잘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난 확실한 증거와 풍성한 열매가 있었다면 필자가 왜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했겠는가? 필자의 처음 사역은 누굴 가르치려고 시작한 게 아니다. 그랬다면 십년동안 아내와 단둘이서 예배를 드리는 걸 고집했겠는가? 그간 교회에서 가르쳐준 기도방식으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죄다 버리고 하나님을 다시 찾아 나선 것이다. 그래서 성경대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아닌가? 그렇다면 성경에 쓰인 대로 기도해야 바른 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별로 없다.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이 즉각 내려오고, 복이 쏟아지고, 문제가 단박에 해결된다는 투의 말만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하는 게 전부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아니라면 아무런 열매가 없지 않은가? 성경 어디에서 기도만 하면 응답이 쏜살처럼 온다고 말씀하던가? 아니 있다고?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거나 ‘네 입을 크게 벌라 내가 채우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걸 모르는 필자가 아니다. 그러나 ‘믿고 구하는 것’이라는 성경적인 의미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걸, 성경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네 입을 크게 벌라’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백번 양보에서 그런 기도를 수년 아니, 수십 년 해온 당신이 얻은 게 무엇이 있는가?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는 구조요청을 어떻게 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게 자신의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구조를 호소하는가? 아님, 설득력 있는 어조나 웅변조의 말투나 기승전결의 논리대로 요청하는가? ‘아니, 사람이 죽기 일보직전인데,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거야, 이 양반아’ 하며 핀잔을 주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며 찾는 것은, 익사 직전의 사람이 다급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해 ’살려 달라‘는 말만 반복해서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아니라 무소불위하시며 전지전능한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요청하려면 인간적인 지혜와 세상의 방식대로, 설득력 있는 기도문에다 희생의 강도를 더하는 기도를 해야 들어주실 거라고 믿고 있다면 하나님은 과소평가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분은 당신이 기도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한마디 언급도 없이, 눈물만 주르르 흘리고 있어도 엄청난 호소력 있는 기도라는 걸 모르는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랬다. 그녀는 삶이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성전에 가서 기도할 때마다, 기도가 아니라 넋두리를 늘어놓곤 했다. 오죽했으면 엘리제사장이 술에 취해 기도하지 말라고 핀잔까지 주었겠는가? 인생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절박한 기도를 해본 사람은 다 안다. 억장이 무너지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한마디 부른다면 그보다는 좀 상황이 나은 게 아닌가? 기도란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 외에 다른 말이 또 필요할까?

더불어 기도에 정의에 대해 한 번 살펴보자. 기도란 헬라어로 ‘푸뤼스케’이다. 이 기도 안에는 하나님을 부름, 찬양, 감사, 회개 그리고 간구와 중보기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간구는 요청하는 기도로서 헬라어로 ‘데시스’라고 말하고, 중보기도는 좀 어려운 한자어인 도고라고 변역되어있는데 헬라어로 ‘엔튁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회개하는 것은 뒷전이고, 자신이 얻고 싶은 목록만을 주구장창 외치는 간구가 대부분이 아닌가? 하나님은 불량한 아들이 위협하고 생떼를 써서 부자 아버지의 재산을 뺏어내려는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며 대자연을 다스리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사람의 영혼을 지옥과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 엄청나게 두려운 분이시다. 그래서 잠언에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다’는 원어의 뜻이 완곡한 한자어인 경외(敬畏)라는 말로 변역해놓아 종교적인 용어도 변질(?)된 감이 없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저지른 과오나 지난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해결사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과소평가하며 쉽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여성이라서, 공식석상에 나가 박근혜여사라거나 아줌마로 부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당신은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하나님이 오신 것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사항만을 큰소리로 반복해서 외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오만무례한 발상인가?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바라고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얼마나 후안무치한 처사인가? 그동안 그런 기도행위로서 응답이 내려오고 인생의 지난한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필자 역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당신의 기도에 무엇이 문제인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전에 성령께서 하나님을 부르며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예배가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가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란 말인가? 물론 각자 하고 싶은 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도 기도를 시작하면 적어도 30분에서 1시간은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며 할렐루야로 찬양하는 시간을 갖는다. 필자는 그런 기도방식대로 하나님을 만났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필자의 제자 역시 동일한 기도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기도방식은 필자가 계발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누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실행에 옮긴 것뿐이다. 기도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자신이 만족스럽게 여기는 기도방식이 무슨 소용인가? 지금까지 자신이 지극히 만족스러운 기도를 했더라도 아무런 열매가 없었다면 이제 그만 하시길 바란다. 그동안 해온 것만이라도 충분하다. 예전에 난로가 뜨거운지 모르고 앉았다가 엉덩이를 덴 경험이 있는데, 여전히 뜨거운 난로에 앉으려하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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