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Paradiso: 전직 영화관 마케터가 꿈꾸는 영화관

in #cinema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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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영화관이란 곳에 처음 갔던 때를 기억하는가? 어릴 적 내가 살던 고향엔 극장이 없어 영화를 보려면 전주 시내까지 원정가야만 했는데, 나의 첫 영화관 역시 초등학교 4학년 즈음 온 가족이 성탄 연휴를 맞아 갔던 전주 아카데미극장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관보다는 비디오 가게에서 테이프를 빌려 집에서 보는 것이 더 익숙하던 때였다. 그래서 극장이란 곳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열한 살짜리 초딩에겐 새로운 문명의 개혁이자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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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 펼쳐지던 수많은 좌석과 큼지막한 스크린을 보고 느낀 전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코딱지만 한 동네 극장이었을 텐데, 그때는 왜 그리 커 보이던지. 관람 영화는 [이집트 왕자]. 모세의 기적을 그린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으로, 크리스마스에 딱 어울리는 가족 영화였으리라. 덕분에 전북 도민은 다 모였나 싶을 정도로 영화관은 만석이었고, 선착순으로 좌석을 선점하지 못한 이들은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봐야만 했다. 영사기의 뿌연 빛줄기, 끼익 끼익 소리 나던 빨간 의자, 아이 우는소리, 옆에서 담배를 맛있게 태우던 아저씨, 비슷한 때에 들려오던 사람들의 웃음소리. 내 첫 영화관에 대한 기억이다.

그 뒤로 다시 찾은 영화관에서 본 생애 두 번째 영화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1]으로, 함께 갔던 사촌들은 꿀잠을 잤고 나는 최초의 여성 제다이 마스터를 꿈 꾸며 영화관을 나왔다. (제대로 된 여성 제다이의 등장이 그로부터 19년 뒤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처럼 같은 영화를 보아도 계몽하는 인간이 있는 반면, 어떠한 감흥도 없어 낮잠을 선택하는 이도 있는 것이다.

국내 멀티플렉스 체인 중 하나인 메가박스(MEGABOX)의 브랜드전략팀에서 마케터로 5년 가량 일했었다. 메가박스는 매년 해외의 극장과 문화공간, 더 넓게는 도시 차원에서의 콘텐츠들을 리서치하고 메가박스라는 플랫폼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고민해왔는데, 난 막내로서 일정을 조율하고 인터뷰이를 컨택하는 등 코디네이터 역할을 종종 맡곤 했다. 덕분에 오랫동안 극장업에 종사해온 임직원분들과 함께 필드트립을 다니며 배움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세계의 많은 도시와 공간들을 리서치하며 내 나름의 '이상적인 극장'의 모습도 정립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내 극장을 직접 운영해보리라는 꿈과 함께.

극장 업주의 꿈이 생기니 여행을 갈 때 출장이 아닌데도 꼭 그 도시의 영화관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세계 곳곳을 다니며 발견한 매력적인 곳들을 토대로 내가 꿈꾸는 영화관의 모습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빗댄 것이니, 각자 생각하는 이상적인 극장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35인의 거장들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서 그리는 영화관의 모습들이 제각기 다른 것처럼 서로가 만들고 싶은 극장의 모습 또한 다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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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은 단관영화관 주인장

내가 사는 동네에 정겨운 단관영화관을 운영하는 것. 이게 영화관인지 카페인지 바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곳. 대로변에 있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골목 깊숙이 찾기 힘든 곳에 있으면 좋겠다. 길을 걷다가 모퉁이의 작은 영화관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갑자기 '오늘 영화나 한 편 볼까?' 하며 들리는 그런 곳. 상영 시간이 맞지 않아 영화를 보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라운지에 삼삼오오 모여 언제든지 영화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 영화 살롱. '내가 가는 영화관은 남들은 잘 몰라~' 하며 짐짓 있는 체할 수 있는 그런 혁오 같은 영화관. (이쯤 되면 장사할 마음이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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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부 외곽에 자리 잡고 있는 에브리만 벨사이즈파크(Everyman Belsize Park)가 딱 그런 영화관이다. 처음엔 그곳이 영화관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쳤더랬다. 간판을 발견하고 반신반의하며 들어갔는데, 영락없는 카페 공간이다. 깊숙이 들어가면 문이 하나 있다. 화장실인가 싶어 들어가 보니 100석이 넘는 질 좋은 가죽 의자가 있는 프리미엄 영화관이 펼쳐진다. 마치 옷장 너머 나니아 왕국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영화를 보지 않고 라운지에서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노신사도 있고, 지나가다 잠시 들러 매니저에게 안부를 묻는 단골손님도 보인다. 밤에는 퇴근 후 칵테일을 마시러 오는 손님들도 많다. 작은 영화관이다 보니 티켓 수익으로는 극장을 운영하는 데 한계가 있어 F&B에 좀 더 집중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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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만 시네마(Everyman Cinema)는 로컬 밀착형 작은 영화관 체인으로, 영국에 22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규모가 크지 않다 보니 확실히 스태프들의 진심 어린 호스피탈리티를 기반으로 지역 커뮤니티와의 높은 친밀감을 유지하고 있다. 규모 때문에 가능한 이유도 있겠지만, 에브리만에서 일하는 파트타이머들이 영화감독, 뮤지션 같은 아티스트가 많다는것도 한몫한다. 영화가 끝난 후 곧장 집에 가지 않고 관객과 스태프 모두가 밤새 영화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를 가지고 나눌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블록버스터도 간혹 상영하긴 하지만, 관객들이 좀 더 다양한 예술영화들을 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한다.

사실 단관영화관의 가장 훌륭한 예는 브런치에서 이미 한 번 다룬 바 있다. 영국의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 소호하우스(Soho House)에서 운영하는 일렉트릭시네마(Electric Cinema)는 영화관 건물의 역사, 공간 디자인, 운영, F&B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

여름에는 밖에서 봐야 제맛
숲 속도, 강변도, 다리 밑도, 그리고 건물의 옥상도 영화관이 될 수 있다. 올해 여름 날씨를 생각하면 밖에서 영화는커녕 가만히 앉아 있을 엄두조차 낼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쾌청한 날씨가 전제되어야 한다. 내게 오픈에어시네마(Open-air Cinema)의 매력을 처음 알려준 곳은 바로 뉴욕의 브라이언트파크(Bryant Park)다. 6-8월 10주간 매주 월요일에 야외영화제가 열리는데, 5시 땡 하고 잔디밭이 개방되자마자 사람들이 돗자리 펄럭이며 전력질주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치열한 자리싸움이 끝나면 모두가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하게 와인 한 잔 기울이며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해 질 녘 뉴욕의 빌딩숲에 둘러싸여 잔디 위에 누워 보는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다. 간간이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이나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마저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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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짝 친구인 조성빈이 노르웨이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2주 동안 가서 지냈던 적이 있다. 방문했던 달이 6월이었는데, 백야 현상으로 자정이 넘어가도 해가 지지 않았다. 덕분에 우린 밤새 놀고 다음날 정오가 넘어서야 일어나는 베짱이의 삶을 보냈더랬다. (집에 커튼이 없어 언제나 안대를 착용하고 자야만 했다. 밤새 해가 지지 않으니까..) 어느 나라던지 수도를 가면 관광객들이며 현지인들이며 인구밀도가 높기 마련이나, 오슬로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이라며 조성빈이 나를 오슬로 시내 중심가에 데려다 놓았을 때도 어깨빵(?)은커녕 너무나도 한산했다. 그런데 오슬로의 모든 시민들이 다 모였던 것만 같은 곳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상트한스하우겐파크(St. Hanshaugen Park)의 야외영화관(Utekin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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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명가량 수용 가능한 넓은 공원이었지만, 페이스북 이벤트를 통해 참석 의사를 밝힌 이가 25,000명이 넘었다. 실로 2만 명 넘는 사람들이 다 온 것만 같았다. 금요일 밤이기도 했고, 날씨가 좋았기에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모였던 것이리라. 영화는 누구나 좋아할 만한 프랑스 코미디영화 [언터처블: 1%의 우정]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무리였다. 빈자리를 찾아 계속 뒤로 이동하다 보니 스크린은 점점 코딱지처럼 작아져만 갔고, 결국 우리는 공원 뒤편으로 피신했다. 영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영화의 사운드와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가져온 말벡 와인 한 병과 파스타를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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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공원에서의 영화 상영은 무료였기에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수익 사업으로 야외영화관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케이스도 물론 많다. 그중 스페인 마드리드의 극장 체인인 카야오시티라이트(Callao City Lights)가 여름에 운영하는 야외영화관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역사적인 건축물에 둘러싸여 영화를 보는 경험이 특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카야오 극장은 옛 스페인의 군사령부 건물이었던 18세기 건축물 돈데두케 병영(Cuartel del Conde-Duque)을 마드리드시에 월 1만 유로가량 지불하고 임대해 야외 레스토랑과 영화관을 함께 운영한다. 레스토랑 구역과 영화관은 그 규모가 반반이나, 레스토랑 담당 직원들이 더 많다. 티켓 수익보다 F&B 수익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영화를 온전히 보는 것을 기대하며 야외영화관에 가겠는가. 자연 속, 혹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배경 삼아 맛있는 음식과 함께 한여름 밤을 즐기기 위해 가는 것이고, 거기에 영화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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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friendly Cinema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주변 친구들은 영화 한 번 보기 쉽지 않다. 아이 둘 부모인 나의 친구 정준, 임세진 부부는 2012년 개봉작인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피나]를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간 기억이 없다고 한다.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만약 부모가 영화 보는 동안 아이를 봐주는 영화관이 있다면 맡기겠느냐고 물었다. 내심 대박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할 줄 알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친구들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불안해서 어떻게 맡겨. 영화 내용도 잘 안 들어올걸?"

그럼 엄마 아빠들은 애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마음껏 영화관에 가지 못한단 말인가. 그건 너무 잔인하다. 유럽의 어떤 영화관들은 아이와 부모가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는 시간대를 지정하기도 한다. 독일 베를린의 유서 깊은 영화관 키노 바빌론(Kino Babylon)은 매주 수요일마다 영유아기의 자녀를 데리고 오는 부모들을 위해 상영관의 조도를 높이고 영화 음향을 조금 낮춰 상영하는 '유모차 영화관(Kinderwagenkino)'을 운영한다. 영화를 보던 중 아이가 말을 하거나 울어도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으며, 수유를 하면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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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유아기의 아이들이 영화관에 갈 수 있다고 해서 키즈프렌들리 영화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순전히 아이들보다는 부모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동기 때의 경험이 평생 간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에 대한 나의 행복했던 첫 기억 또한 열 살 때였고, 그 시기에 쌓은 영화관에서의 경험들이 영화를 사랑하는 지금의 나로 성장시켜주었다고 믿는다. 어린이 관객은 영화관의 미래 잠재 고객이나 다름없다. 어린이들에게 투자하고 영화에 대한 교육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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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아랍에미리트에서 영화 [미니언즈]를 보러 두바이의 영화관 릴시네마(Reel Cinemas)에 갔다가 아이들이 떼를 지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릴시네마가 여름방학 기간에 맞추어 진행한 영화 캠프 'Future Filmmakers Summer Camp'였다. 아이들은 8월 한 달 동안 각본부터 상영까지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우게 된다. 막바지엔 1분짜리 단편영화를 만들게 되는데, 캠프가 끝난 후 상영회와 함께 시상식을 연다. 이게 영화관에서 운영하는 캠프라 하여 결코 얕볼 게 아니다. 두바이 머독대학교와 협약을 맺고 전문 조교들이 체계적인 커리큘럼으로 가르친다. 니콘에서 촬영 장비 또한 후원하며, 영화 업계 종사자들이 시상식에 참여하기도 한다. 누가 아는가. 이 아이들이 미래의 스티븐 스필버그와 소피아 코폴라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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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영화관인 라비아(Labia Theatre). 1949년부터 그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건물의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국립영화재단의 지원으로 아프리칸 영화만 상영하는 관이 있다. 건물 2층 오른쪽 창에 붙어 있는 하트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 영화관인가 싶어 친구에게 물으니 포르노영화를 상영하던 곳이란다. 와우... (포르노 말고 스타워즈 시리즈만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공간은 밀레니엄 팔콘 컨셉으로 디자인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