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엠마누엘 레비나스 - 시간과 타자

in #emmanuellevinas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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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7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라는 존재론적 지평이 아니라 존재 저편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사유의 관계>로 예감한다.

p. 29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우리가 시간의 방향성에 대해 갖는 보통의 이미지는 대개 전방으로 향하거나 우측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책과 악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가게 되어 있다. 글자를 쓸 때에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획이 나간다. 왼쪽은 과거이고 오른쪽은 미래인 세상에서 시간은 언제나 방향에 대한 암시를 가지고 흘러가는 셈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특히나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들은 시간에 묶여서 오른쪽의 노화를 필연적으로 겪는 것인데, 레비나스의 논지는 수직선상에서 흐름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관계 중심의 사건으로 재편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타자가 없다면 시간도 없다는 그의 생각은 다소 급진적이며 대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크게 방향을 꺾는 시도인데, 그렇다면, 시간의 예술인 음악도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일까.

‘타자’라는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에게도 레비나스에게도 타자는 말 그대로 내가 아닌 존재다. 나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혈육일지라도 그는 타자다. 내가 아니라면, 나는 타자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넘을 수 없는 그 차이가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신비’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음악에서 ‘타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보통 음악을 인격적 존재로서 취급하지 않으므로 ‘타자’라는 말을 붙이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만들어진 음악을 상대하는 존재가 주로 감상자이므로, 여기에서는 감상자를 타자로 한정하기로 한다. 여러 가지 입장에서 달라질 ‘타자’의 존재는 뒤에 이어질 논의에서 후술하기로 한다.

감상자가 없다면 음악은 의미가 없는가?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세상의 모든 음악가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만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그 정도의 고립성을 유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만의 원칙을 지켜가며 감상자의 만족을 등한시하는 이도 있다. 정반대로 오로지 사람들의 반응만을 위해 음악을 만들어내는 이도 있고, 극히 드물지만 양방향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음악은 감상자 없이는 의미가 없다. 음악은 세공된 시간이자 흐름이기 때문이다. 실연이든 녹음이든, 공기를 울리지 못하는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시간이 되지 못한다면, 흐르지 못한다면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이 있다 해도 같은 결론으로 귀결될까? 그렇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을 만든 이조차 그 스스로에게 감상자가 되기 때문이다. 공기를 울리지 못해도 음악은 그의 상상과 생각 속에서 공명한다. 그러면 창작자는 곧 스스로에게 감상자가 되어준다. 감상자 없는 음악은 없다. 타자 없는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p. 45 …의식의 고유한 의미는 숙면에 들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 있는 깨어 있음에 있지 않는지, ‘나’라는 사실은 비인격적인 깨어 있음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아닌지 물어보아야 한다.

레비나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잠이 없는 의식이 곧 불면증이다. 불면증이 괴로운 것은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잠을 자기 때문에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정도이겠다. 나는 이 주장에서 ‘잠’과 같은 음악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쉼표가 있기 때문에 음이 의미 있는 것이다,라는 비례식을 적용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재생되지만, 인간에게 ‘잠’과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음악이 가능한지에 대해 궁금한 것이다. 의식을 쓰러지게 만드는 음악.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갈 능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가림막이 되는 음악. 강렬하게 흥분시키거나 환희에 차게 만드는 음악은 ‘잠’의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잠과 같은 음악은 재생되는 동안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정지할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할 것인가? 나는 이것이 현세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야 이루어질 법한 것이라고 느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p. 54 …최초의 자유는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매이게 되는 대가를 치른다. 고독의 비극을 구성하는 이러한 존재자의 결정적 매임이 바로 물질성이다. 고독이 비극적인 것은 타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 안에 포로로 갇혀 있기 때문이고 고독이 곧 물질이기 때문이다.

p. 57 고독은 말하자면 물질로 가득 찬 일상적 삶의 동반자다.. (중략)... 일상적 삶은 우리의 고독에서 나오며, 고독의 진정한 성취이며 속 깊은 불행에 대응하고자 하는, 무한히 진지한 시도이기도 하다…(중략)... 일상적 삶은 구원에 몰두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줄곧 주장하는 고독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음’이다. 그렇다면 재즈 연주자는 고독한가? ‘재즈’라고 한정 짓는 것은 유독 즉흥연주의 탁월성에 목을 매기 때문이다. 즉흥이라는 것은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을 거쳐 거듭 가다듬는 일도 아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오직 지금만이 있는 연주. 제아무리 즉흥연주가 긴긴 시간의 연습과 코드의 암기, 연주는커녕 이해조차 어려운 음악적 이론, 온갖 예술적 영감의 중첩을 통한 퇴적층의 단면이라고 하더라도, 레비나스에 의하자면 그것은 결국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므로 철저히 고독하다. 그러므로 재즈 연주자는 고독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일들, 즉 헤아리기 어려운 연습 시간과 음악적 시도, 스스로의 내면에 가능한 한 모든 예술적 영감을 샌드위치처럼 쌓아놓으려는 노력이 재즈 연주자의 일상이므로, 무대에 올라 스스로도 기원을 알지 못하는 순간에 진입하는 일까지 포함하여 그는 구원에 몰두하는 중이다. 재즈 연주자에게는 그것이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고독의 성취이다. 너그럽지 않은 환경과 빈곤과 무지가 ‘ 속 깊은 불행’이라면, 음악가는 스스로 걸어들어가 고독을 유발해낸 장소에서 상상과 호기심으로 일구어낸 일상을 찾아낸다. 그것이 고통인 동시에 성취다.

p.72 …세계는 주체에게 향유의 형식으로 존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며 결과적으로는 자기에 대해 거리를 두고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중략)... 모든 향유는 또한 감각 활동으로서, 곧 인식이고 빛이다. 자기 소멸은 아니지만 자기 망각이며 말하자면 최초의

체념과 같은 것이다.

연주자에게 재즈는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대상이 된다. 곡이 가지고 있는 코드의 진행과 리듬, 시시각각 나타하는 즉흥적인 변신은 끊임없는 자극으로 연주자에게 무한한 즐길 거리-연주자가 그것을 즐길 만한 기량이 된다는 전제 아래-를 제공한다. 이 상호작용은 곡과 연주자가 일종의 화학 작용처럼 서로 영향을 주며 변화하는 과정인데, 곡은 연주자를 열어젖힐 수 있어야 하며 연주자는 많은 영감을 소유한 복합적인 존재로서 곡의 내부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실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레비나스의 말대로라면, 향유로서의 재즈는 앞서 상기한 과정을 축적이 아니라 상실로 재현해낸다. 상실이라는 단어에 으레 따라붙는 비극적인 이미지를 제거하고 나면, 분리를 생각해 낼 수 있다. 음악가는 분리하는 과정으로서 연주하는 내내 내부에 쌓아놓은 조각들을 풀어낸다. 그는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으며 희열을 느낄 수도 있다.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자신을 잊은 채 자신에게 집중한다. 하고자 했던 것, 하고 싶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이전에 있던 것들에게는 결별을 고하며 그저 다가오는 미래의 음악적 요소를 현재의 것으로 시제 변환한다. 그때에 음악가에게 벌어지는 일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 그를 이끌어갈 수도 있고 그가 스스로를 밀어낼 수도 있다. 의식의 한쪽 끝에 어렴풋이 연주의 마무리를 느끼고는 있지만 그곳만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는다. 이는 일종의 바다 수영과도 같다. 레인도 없고 터닝하는 지점도 없지만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경계하는 도중에도 쉼 없이 팔과 다리를 놀린다. 마침내 돌아가야 할 지점에 다다른 음악가는 분리의 과정을 실현해낸다. 그는 자신을 잊었고 적극적으로 과거의 유산에 대해 체념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적인 모습일 뿐. 보통의 경우 많은 이들이 연주하는 중에 자신을 잊지 못한다. 이것이 향유를 상실하는 과정이다.

p.75 아픔과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고독의 비극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보게 된다. 이 결정적 요소는 향유의 무아경을 통해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만 앞에서 논의했던 ‘향유로서의 음악’도 결국은 고독을 이겨낼 수 없다. 음악은 끝이 있기 때문이며, 설령 끝이 없는 음악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무아경은 반드시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무아경은 인간의 자격을 말소한다. 그러므로, 연주든 감상이든 음악의 종료는 고독의 귀환을 의미한다. 우리가 음악의 종료를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이내 다른 자극을 찾아서 떠나지만 않는다면.

p.85-86…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Mystère)와의 관계이다…(중략)... 죽음처럼 강한 에로스는 저 신비와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필요한 바탕을 제공해 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음악의 타자는 감상자였다. 이번에 시도하는 분석은 연주자가 앙상블을 함께하는 다른 연주자를 타자로 경험할 때의 경우다.

앙상블, 그것이 2인이든 3인이든 혹은 훨씬 더 많은 수이든 즉흥 연주를 시도하는 재즈 연주자는 일치보다 강렬한 차원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그가, 그들이 즉흥연주하는 동안에는 선율의 굽이침과 리듬의 변형이 일어나고 각기 변화에 맞추어 자기 자신의 생존을 도모한다. 그들이 하나가 된다고 느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히 타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그것은 하나가 된다기보다는 일시적인 합체에 가까운 일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연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타인의 연주에 반응하고 싶어 한다. 다른 연주자와 나의 차이를 듣고 반응하는 일은 동일화에의 욕망이 아니라 그의 에너지를 튕겨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남과 나를 가르는 신비로서의 단절에 화답하는 일이며 닿지 않을 것을 예감하면서도 자신의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답하는 외침이다. 그것이 좌절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타자와 나의 거리를 가늠하는 감각이 극도로 활성화되는 일이다. 닿을 곳을 모르고 시도하는 이러한 시도들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목적지를 모른 채 다가올 미래를 찾는 행위인 ‘애무’와도 비슷하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에로스는 합일과 일치의 경지가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를 경험하는 일이었으므로, 그가 재즈 연주자들의 즉흥연주를 보았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에로스다’라고 얘기할 만하지 않았을까.

이에 관련해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있다면, 앙상블 없이 즉흥 연주하는 단 한 명의 솔로이스트는 오로지 고독할 뿐인가,라는 것이다. 나와의 차이에 반응하는 타인이 없다면, 그는 오로지 자기에게 매어있을 뿐인가? 확실한 일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로서의 악기(樂器)에 반응하는 신비가 조금은 남아 있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연주자가 무아경에 빠져 있는 상태일지라도, 완전히 자기 자신은 되지 못하는 전혀 다른 구조를 지닌 존재로서의 악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을 하더라도, 아무리 완숙한 기량의 연주자라도 언제나 찰나에 삐끗할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악기 역시 신비로서의 단절로, 주체와 분리된 타자가 아닐까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p. 108 …그러므로 무엇이 에로스를 점령과 지배와 구별짓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을 때 에로스 안에서의 의사소통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중략)... 그것은 타자성과의 관계요, 신비와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 모든 것이 현존해 있는 세계 안에서는 결코 현존해 있지 않는 것과의 관계요, 모든 것이 현존해 있을 때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현존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성[즉 다름]의 차원 자체와의 관계이다.

즉흥 연주자들은 멜로디를 예감한다. 그러나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내가 어떤 것을 연주하게 될지에 대한 청사진 같은 것이 있지는 않지만 마침내 그 순간이 나에게로 와 당도할 때 절감하게 되는 멜로디가 있다. 그전까지 연주자와 멜로디의 관계는 미래와 현재의 꾸준한 응답으로서 주파수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지는 서로를 조금씩 더 명료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둘이 닿기 전까지는, 멜로디는 있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마침내 연주된 멜로디는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못한다. 연주자에게 있어 멜로디는 현재가 된 순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고 이것은 멜로디가 연주자에게 또 다른 타자로서 언제나 미래로서만 기능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이야기한 ‘신비와의 관계’이다. 모든 것이 드러나 있는 세계 안에서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는 점령이나 지배, 소유와는 같이 움직일 수 없는 현상으로,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신비 그 자체에게 굴욕적인 일이다. 연주자가 언제나 닿고 싶어 하는 멜로디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한, 그의 손과 발은 목적지를 모르는 곳을 향해 가는 애무와 같고 바로 이 미지성이 향유는 하되 소유는 할 수 없는, 접근해오는 멜로디에 대한 에로스를 완성한다. 저 멀리 미래에서 오는 멜로디는 에로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