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의 “돕겠다”는 말에 담긴 태도
- 돕겠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절대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얼마 전 TV탐사보도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배우, 국회의원, 가수, 영화감독 등 유명한 남성들이 이렇게 선언했다. 안타깝지만, 그들의 선언이 반갑기는커녕 마음 속에서 싸늘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미 공분이 일어난 후에 취하는 안전한 분노를 보며 고마워해야 하나. 일단 ‘돕겠다’는 말부터 거슬렸다. 여성은 동등한 인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도와주는 나’를 과시하는 사람치고 그 도움 받는 대상을 존중하는 사람 없다. 게다가 여성은 남성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인격적 관계는 편파적인 도움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여성을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만드는 그 태도가 오히려 불쾌하다. 게다가 ‘돕는다’는 말은 성폭력에 가담하는 사람과 자신을 분리하는 태도다. 누구에게서 누구를 돕는다는 말인가. 성폭력 앞에서 남성의 얼굴과 남성의 목소리로 ‘도와주겠다’고 말함으로써 성폭력 피해를 더욱 ‘여성화’하고 남성은 도와주는 남성과 ‘개새끼’로 나뉜다.
여성이 백 번 천 번을 말해도 안 들리던 말은 희한하게도 남성의 한 마디면 효력을 발휘한다. 여성의 말을 주워서 남자의 얼굴과 남자의 이름으로 발화하여 칭찬받는 모습을 볼 때, 저 발화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이 무엇이며 그 권력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과연 알고 있을까 진지하게 궁금해진다. 그들도 나름 진심일 것이다. 진심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진심으로 돕고 싶을 것이다.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는 신분이라고 해서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말하기 더 쉬운 위치는 아니다. 검사라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검사가 방송에 나와 말하니까 그나마 듣는 척이라도 하는 귀들이 늘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말할 때는 무시하기 훨씬 쉬웠다. 당장 자유한국당의 류여해가 홍준표의 성희롱을 폭로할 때도 홍준표는 “성희롱도 할만한 사람한테 해야지”라고 반응했고, 이 반응에 낄낄깔깔 웃은 사람들이 한둘인가. 진영을 공격하는 도구로만 성범죄를 활용하는 이들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반응을 달리 한다.
또한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이 삭발을 하며 그들이 겪는 성추행을 말했고, ’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2016년 가을부터 sns에서 수시로 성폭력 고발이 있었고,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성폭력 실태, 여성 군인들에게 벌어지는 성폭력 등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각계각층에서 목소리 냈으나 듣지 않았다. 만만한 계층의 여성은 만만해서 무시하고, 지식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에게는 ‘억압받는 게 그저 성 밖에 없어서 투정부린다’는 식으로 ‘중산층’이라는 딱지를 비겁한 방식으로 남발하여 입을 막았다. 그렇게 귀 틀어막고 눈 가린 채 안 듣고 안 보다가 사건이 터지면 예상대로 ‘나는 몰랐다’라고 합창을 한다.
- 그때
왜 기껏 있다가 8년 만에 말하냐고? 8년 동안 찾을 수 있는 방법이 결국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가능하도록 수많은 침묵의 연대가 든든하게 버팀목을 만들어주었다. 8년 만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에 나와 직접 말하기까지 8년이 걸린 것이다. 지금 8년이 대수인가. 8년? 18년, 아닌 80년 동안 말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뜬 여성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사소한’ 성희롱을 포함하여 성폭력 피해 경험이 전무한 여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과 무관하게 대부분 피해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왜냐면 피해자에게 불명예를 주기 때문이다. 사실이 알려졌을 때 성폭력 피해자는 수치심을 얻지만 성폭력 가해자는 ‘재수 없게 피해자 때문에 발목 잡힌 불운한’ 사람이 된다. 여성끼리도,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피해 사실을 말하는데 ‘피해의식’이라고 공격하는 경우도 다반사며 일자리를 잃기 쉽다. 현재 통영 지청에서도 서 검사의 사무실을 비웠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그렇게 고립 속에서 곪아가지만 가해자는 죄책감이 없다. 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그렇게 ‘그때’라는 시간에서 점점 멀어진다. 반면 피해자는 지속적으로 ‘그때’ 있었던 일을 복기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정체를 생각한다. 서로가 다른 시간에 산다. 그러니 가해자를 비롯하여 주변인들은 ‘왜 갑자기?’라는 의문을 종종 제기한다.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그때’에서 멀어진 사람에게는 ‘갑자기’지만 ‘그때’를 계속 생각하다가 말을 꺼낸 사람에게는 ‘갑자기’가 아니다. 그런 입들 때문에 피해자는 더욱 말을 못한다. 내가 지금 말하면 누가 내 말을 믿어줄까.
대대손손 여성이 겪는 폭력에 침묵으로 동조했으면서 수 년이 지나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의심한다. 배우 장자연은 왜 스스로 삶을 마쳤을까. 사람이 죽어 나가도 듣지 않았다.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한 남성의 ‘성욕’과 분노를 그토록 잘 이해하는 사회에서 피해 여성의 분노는 이해하지 않는다. 남성의 감정은 맥락을 가지고 정치화 되지만 여성의 감정은 정치화되지 못하게 방해 받는다. 되려 다른 의도를 찾으며 꽃뱀화 한다. 가해자를 이해하고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법과 문화 속에서 여성의 피해 경험은 침묵에 갇혀야만 했다. 꺼진 마이크 앞에 서서 소리를 지르는 기분이다.
- 당했다
성범죄 피해를 표현할 때 이 ‘당했다’는 말은 무척 거슬린다. 일부 언론에서는 Me too를 ‘나도 당했다’로 번역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표현은 묘하게 피해자를 ‘당한 사람’으로 가두고 무력한 이미지로 전시한다. ‘미 투’에는 나도 겪었다, 나도 다르지 않다, 나도 말한다, 나도 연대한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등 폭로를 넘어 연대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단순하게 ‘나도 당했다’라는 말로 옮겨질 때 발언을 한 사람은 ‘당한 사람’으로만 보인다. 이재정 의원이 ‘미 투’에 동참했을 때 받은 질문 중 아주 불편했던 점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당했냐”, “의원님도 당했는냐”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얄팍한 호기심에 기반한 질문이다. ‘당했다’와 함께 짝패를 이루는 말이 ‘건드리다’이다. 가해자 입장에서 형성되는 표현이다. 폭력이 그저 ‘건드리는’ 일일 뿐.
이처럼, (여성이) 당했다, (남성이) 돕겠다 등으로 구성된 목소리는 여성을 너무도 수동적인 상태로 그린다. 피해자, 혹은 경우에 따라 피해 생존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늘 사건의 명칭을 피해자의 이름으로 명명하며 피해자만 기억한다. 성범죄 관련 기사에 첨부되는 이미지가 주로 웅크린 채 ‘당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듯이, 폭력이라는 사건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당한’ 사람을 구경거리 삼는다. 바로 이런 태도가 피해 경험을 더욱 말하기 어렵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me first’를 제안한 현직 판사는 ‘피해자 서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연대와 고발의 목소리를 ‘피해자 서사’에 가두는 수많은 사회의 시선을 지적하기는커녕 아예 ‘피해자 서사’로 규정지었다. 물론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피해자 서사’만으로 부족하다고요? 여성들의 그 많은 고발이 그저 ‘피해자 서사’로만 보이십니까. 현재 입을 여는 많은 여성들은 서사를 직조하는 중이다. 또 한 국회의원은 피해자 편에 서면 평생 뿌듯하다고 한다. 뿌듯하기 위해 피해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시혜의식은 바로 “우리가 돕겠습니다”와 맞닿아 있다. ‘당했다’는 표현부터 ‘돕는 대상’으로 여기는 그 시선들은 모두 일맥상통한다. 가해자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게 가해자의 가해 행위가 형성되는 이 사회의 복잡한 얼굴은 증발한 채 ‘당한 여자’의 얼굴만 덩그러니 남아 구경거리가 된다. 나아가 여성은 ‘당한’ 여자와 ‘아직 당하지’ 않은 여성으로 나뉘며, 성폭력의 개념은 ‘부녀자를 건드리는 행위’라는 젠더 이분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덧붙여 여성들의 목소리를 두고 ‘젠더 전쟁’이라고 하지만, 이 표현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은 분명히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져야 한다. 인권 투쟁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많은 ‘훌륭한’ 이들이 현재 여성들의 목소리를 평가한다. 마치 그동안 한국 여성들이 구석에서 그저 벌벌 떨고 있다가 이제야 목소리를 내는 듯이 말한다. 용기있다고 추켜세우거나, 한국에는 그 동안 이런 움직임이 없었다고 아예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안 듣고, 안 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 수 있다니 그게 바로 권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검찰에서 더 이상 은폐할 수 없이 사건이 사건화되자 조사단을 꾸렸다. 조사단장을 여성 검사로 정하고 조사단 7명 중 6명을 여성으로 구성했다. 공정한 듯 하지만 어딘가 씁쓸하다. 대부분 성범죄를 남성이 저지르고 그 뒷수습을 위해 여성을 앞에 내세운다. 조사단장의 과거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역시 은폐의 동조자였다. 그런데도 여성을 앞세우는 이 전략을 통해 ‘여자들 문제’로 전환시켜 버린다.
한 사람의 폭로는 많은 맥락 속에서 이뤄진다. 곪아서 터져나오는 것이다. ‘~내 성폭력’으로 SNS에서 해시태그를 달고 수많은 사건들을 고발할 때, 이는 단지 ‘피해자 서사’가 아니었다. 말해왔고, 연대했고, 싸워왔다. 그 목소리들은 상대적으로 외면받았으나 이제 와서 ‘한국판 미투’라고 부른다. 직접적인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않은 ‘미 투’라는 추상적인 구호가 입에 올리기 더 편해서일까.
- 공범
서 검사의 인터뷰에서 손석희의 “검찰에 있기가 어렵겠네요”라는 말은 참으로 얄밉고, 무책임하게 들렸다. 아, 그렇구나, 성폭력이 ‘남의 일’이니까 방송에서 피해 당사자를 앞에 두고 거리낌없이 그런 말을 뱉을 수 있구나. 주저없이 튀어나온 이 발언은 그를 비롯하여 이 사회가 축적한 역사를 보여준다. 피해자가 일을 그만두는 것이 당연하고, 보편적이기에 별 조심성 없이 말한다.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없기에 피해자의 입장이 되지 못한다. 남의 일이니까. 기껏해야 딸들을 걱정할 뿐이다. 한샘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피해자는 왜 직장을 그만둬야 했을까. 피해자는 어떤 사건에 있어서 피해자일 뿐 그의 온 정체성이 피해자가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는 그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너무도 강렬하게 피해자 정체성만으로 보여진다. 정당하지 못한 수많은 눈과 입때문에 결국 피해자가 스스로 사라졌다.
최근에 본 영화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가 생각난다. 강간 후 살해된 딸의 엄마는 경찰의 지지부진한 수사를 더는 믿을 수 없어 경찰서장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광고판을 동네에 설치한다. 작은 마을에서 이 광고는 주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주인공 밀드레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불만을 제기하는 신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밀드레드의 집에 찾아온 신부는 밀드레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당신과 당신 딸 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경찰서장을 비난하는 광고) 있어서는 당신 편이 아니다.” 교묘한 말이다. 밀드레드는 이렇게 대응한다. 교회에서 소년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성범죄에 당신이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당신은 죄가 있다고.
성매매 여성을 불러주지 않으면 화가 나서 방화를 저지르는 남성이 있다. 여성을 성적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이 ‘문화’ 속에서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에 상대적으로 죄의식이 없다. 왜냐면 모두 그 가해자의 마음에 이입해서 가해 행위를 ‘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묵살로 쌓은 언덕 위에 앉아 내려다 보며 평가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죄에 동참하는 행위이다.
지금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검찰과는 달리 문단의 문제가 터져 나오자 목소리가 달라지는 사람들. 왜 전체를 매도하냐, 떠보려고 그러지, 지가 능력이 없으면서, 남자한테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렇지, 피해자의 순수한 진정성이 안 보여...... 등등의 목소리 속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폭력을 은폐해왔는지 더욱 잘 보인다. 두려운가. 화살이 점점 자기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 많다. 문제’화’ 되니까 아무래도 문제를 문제로 봐야 할 것 같긴 하지만 그간 쌓아놓은 인간관계를 망칠 수는 없으니 이랬다 저랬다 횡설수설.
저열한 언어를 사용하는 익명의 누리꾼은 외모 품평을 한다면, 우아한 필체로 추잡함을 옹호하겠다는 지성인은 괜히 인터뷰 하는 사람의 태도를 평가하며 문제를 안개 속에 가둔다. 멀리서 보이는 문제에 옳은 말 하기는 쉽다. 평소에 정의 추구의 최전선에 서 있는 듯 하다가도 자신과 가까이 얽혀 있는 사람을 두둔하기 위해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그 마음 앞에서 정말 슬픔이 몰려온다. 예외가 없다. 그저 자기는 아닌 줄 착각할 뿐이다.
[파벨라 동인] 예술사회학자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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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fabella.kr/xe/blog5/83033
파벨라를 스팀잇에서 보다니!!!! 반갑습니다!
태그는 kr 태그를 사용하셔야 한국어 사용자에게 노출이 됩니다. @easysteemit 에서 스팀잇 사용법을 익히실 수 있습니다.
@홍보해 포인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활동하시는데 필요하실테니 스팀파워가 충분히 채워질 때까지 50 스팀파워 임대 드리겠습니다.
(보팅을 하실 지 몰라서 50으로 소심하게 수정.. 보팅이나 댓글 등의 활동이 많으시면 임대 량을 늘리겠습니다.)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알려주신 스팀잇 사용법 잘 익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막 시작했는데, 빠르게 적응해보겠습니다~
속 시원한 글.
"아니, 나는 여성들 편에 서서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뭐가 이상해?"
"오늘도 약자를 도왔다. 뿌듯하군"
하는 남성들이 꼭 봐야 하는 글이네요.
더불어 저도 예전에 미투 글을 쓰고 '당했다'라는 표현을 썼었는데, 다시 한 번 그 구조를 생각해보게 하는 글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의 생각을 너무 극적으로 쓰신것같네요.
사실 남자의 입장으로선 좀 보기 불편하기도 합니다.
여성들만 불편할줄 아는게 아니에요.
불편한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불편하면 그만이지만,
여성들은 겪은 일이고, 겪어야할 일이니까요
'돕겠다'라는 것에서 지극히 방관적인 태도가 드러나네요.
자아의 타자화가 너무 심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든 말에 공감하며
리스팀해 갑니다.
저도 정말 잘 읽고 리스팀해 갑니다~
전 개인적으로 성폭력을 남성이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시 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여초사회에선 반대의 경우도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고 동성에 의한 성폭력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이 성폭력을 행사한 사람에 대한 비판 운동이어야지 성별에 따른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는 듯 한 분위기는 올바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돕는 것도 남성이 돕는다 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 라고 생각 하는게 중요하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