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kr-fiction_쉘터_11화 살인자
역시나 842는 방에 모인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842는 굳이 벌거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유난히 기다란 성기를 축 늘어트린 채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오히려 그런 842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워했다. 거기다 그는 자신과 함께 온 여자와 한 침대를 쓰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딱히 그의 그러한 말과 행동에 나서서 반대할 권리나 특별한 사유 따위는 누구에게도 없었기에 842는 자신과 함께 온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키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여자 847과 한 침대를 사용하게 되었다.
반면 777은 흥분한 776을 진정시키느라 한참 애를 먹어야 했다. 776은 눈물을 흘리며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토록 끈질긴 악연이라니 777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776의 복수심은 시간이 흐르며 그 색이 옅어졌다고 볼 수 있다. 쉘터 안에서 안정적인 생활이 지속되며 더욱 강해지는 생존의 본능, 더하여 777의 끈질긴 설득과 그 사이에 싹을 틔운 연애감정이 776의 복수심을 상당히 희석시킨 것이다.
즉 776은 밖에서 842를 쫓아 달렸을 때와 비교하자면 분노라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쉘터에서 방으로 이동해온 뒤, 842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예의 복수심을 쉽게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복수의 대상인 842가 재차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은 아니다.
허나 억울하게 죽은 친구들의 원수를 갚아주어야만 한다는 사명감, 부담감이 776을 다시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776을 고통스럽게 했다. 거기다 842가 나타나 보여준 모습과 행동들은 776에게 강한 증오와 혐오를 안겨주었고, 그러한 사명감에 무게를 더하고 잠시나마 사라졌던 복수심에 다시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결국 복수는 이루어져야만 한다. 마침내 776은 그런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첫째 날은 그냥 조용히 지나갔다. 당연 776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842도 처음 마주쳤을 때 흘깃 눈짓을 한 것 이외엔 777이나 776을 더 자극하진 않았다.
어차피 842는 방에 온 순서에 따라 776이 쓰는 자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지막 남은 끄트머리 침대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777은 그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단순히 842의 등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777은 혼란스러웠다.
777은 842가 나타나기 전까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목사 778의 이론이 옳다고 여기고 있었다. 두 남녀의 사랑과 애정이 선택의 기준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776과의 입맞춤에 이어진 감정의 변화로 자신이 쉘터에서 선택을 받아 이곳에 오게 된 것이라 굳게 믿게 됐다.
777이 보기에 842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그럴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라 생각했다. 절대 선택받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비웃듯 842가 나타났다. 물론 842가 함께 온 847에게 애정의 감정을 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빠르게 누군가에게 애정을 품을 정도로 842가 감상적인 자 같지도 않았다.
777은 842를 소위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 불리는 인격장애의 전형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그들'에게 선택을 받아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거다. 777은 어쩌면 선택에 관해 자신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오해가 무엇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777은 그런 생각에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777은 퍼뜩 눈을 떴다. 내내 이어진 불길한 기운이 다시금 자신을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피곤함이 채 덜 가신 상태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777과 짝을 이뤄 함께 자는 347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이 방 중앙의 빈 공간에 모여 서있었다. 777은 천천히 사람들이 모인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777은 잔뜩 긴장이 되며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도달한 777은 사람들이 왜 모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776과 842가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한 채로 마주서 있었다. 777이 깜짝 놀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가서 776의 곁에 섰다. 777은 건너편에 선 842의 푸른 눈을 노려보며 곁에 있는 776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776은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 연신 씩씩거리며 답도 않고 842를 똑바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842가 코웃음 한 번 치더니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저 년이 글쎄 날 죽이겠다며 덤벼들었지 뭐요?"
777이 놀란 표정으로 776을 보며 물었다.
"정말이야?"
776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막 잠에서 깨어난 777은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지, 그제야 776의 손에 들린 숟가락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쉘터에서 나오는 음식은 오로지 숟가락으로만 먹을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그렇다, 776은 그 숟가락을 842를 공격할 무기로 삼은 것이 틀림없었다. 777은 어이가 없다는 듯 776을 보며 물었다.
"지금 손에든 그걸로 사람을 죽이려고 한 거야?“
이번에도 842가 대뜸 나섰다. 776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저 망할 년이 내 눈깔에 숟가락을 쑤셔 박으려고 했단 말이야!"
777이 고개를 돌려 842를 노려보았다. 842는 여전히 홀딱 벗은 상태였다. 탄탄한 근육질의 건장한 몸, 예의 축 늘어진 기다란 성기가 777의 눈에 들어왔다.
777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넨 옷부터 좀 입지 그래?"
777의 말에 842가 재차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옷? 여기 옷이란 게 있나? 아니면 지금 당신이 두르고 있는 그 이불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벌거벗은 몸 좀 가리란 말이야!”
“참나 이불은 잠 잘 때나 덮는 거지, 정말 배부른 짓거리들 하고 있네.”
“뭐야?”
842가 777을 똑바로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이봐요 아저씨. 지금 인류가 멸망하고, 지구를 떠나네 마네 하는 마당에 옷 타령이야? 아주 진짜 지랄염병들하고 있네.”
거침없이 내뱉는 842의 말에 사람들이 뒤쪽에서 웅성거리며 말했다.
“말이 좀 심하시네요.”
“당신은 수치심도 없습니까?”
"아니 지구가 멸망하는 거랑 옷 입는 거랑 뭔 상관이에요?"
"맞습니다! 보기 불편합니다!"
842가 고개를 홱 돌려 뒤쪽에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자 사람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자 776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살인자야! 넌 내 친구를 죽였어!"
842가 미간을 좁히며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네가 쉘터에 들어오기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벌써 잊었단 말이야!?"
842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생각났다는 듯 다시 776을 쏘아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 알겠다. 이제 생각났다. 혹시 그 무너진 건물, 폐허에서의 일 말하는 거니? 그게 네 친구들이었구나?”
“그래!”
“넌 어디 있었는데? 뭐 어쨌든 그 자리엔 없었나보구나. 운이 좋았네. 나랑 같이 다니던 그놈은 정말 미친놈이었거든.”
842의 말에 776이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842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그게 뭐? 잘못됐냐?”
“뭐라고!?”
776이 당장이라도 다시 덤벼들 기세로 숟가락을 든 손을 들어올렸다. 777이 진정하라는 듯 776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842가 그 틈에 다시 말을 꺼냈다. 뒤쪽에 선 사람들까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였다.
“다들 알다시피 쉘터 밖은 그저 정글이었어! 인간이 아닌 짐승들이 생존경쟁을 하던 곳이었단 말이야! 살기 위해, 먹기 위해 다들 무슨 짓이든 했어! 나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든 욕망이 해방된 상태였지. 그래! 성욕도 마찬가지였어! 어차피 죽을 건데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인 거야.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하나 못하냐 이 말이야. 아마 그것도 이 지구 종말의 한 과정이었겠지! 난 내가 한 행동에 후회도 죄책감도 없어! 하지만 쉘터에 들어온 뒤로 난 달라졌어! 이곳의 룰에 맞추어 잘 생활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봐라! 이곳의 규칙을 어기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게 누구지? 다름 아닌 너야!”
842의 말에 뒤쪽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그건 그렇다는 말도 작게 들려왔다.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난 776이 다시 소리쳤다.
“그딴 궤변은 집어치워! 그래? 성욕? 욕구?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개자식아! 그럼 왜 그냥 가지 않았어!? 왜 죽였어! 죽일 이유는 없었어! 너희는 할 만큼 했어! 배설을 했잖아! 죽일 이유는 없었단 말이야!!!”
빽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 주저 않는 776의 눈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776은 마침내 잠시나마 흐릿해졌던 비극의 순간으로 자신을 되돌렸다. 다시금 자신을 고통과 슬픔으로 흠뻑 적시기 시작했다.
그런 776을 바라보는 777은 가슴이 아팠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776과 842는 절대 이런 식으로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도록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777은 막 분을 참지 못해 흐느끼기 시작한 776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조용히 776의 귀에 속삭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안 되겠니. 조금만....... 조금만 더....... 778 아저씨 기억나니? 목소리 크던 목사 아저씨말이야. 네가 믿을 지 믿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아니 믿어주면 좋겠어. 난 분명히 봤어. 그들은 말이야. 규칙을 어긴 사람을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 아니야. 그들은 말이야....... 그들은........ 규칙을 어긴 자를 처형해...........”
776이 놀란 눈으로 777을 보았다. 777이 말을 이었다.
"난 봤어. 목사님이 먼지처럼 분해돼서 흩어지는 모습을 말이야. 착각이 아니었어. 네 말대로 내가 널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니 널 그런 식으로 잃고 싶지 않아. 조금만 더 참아줘. 네 복수심은 그대로 둬. 나중에 진짜 복수를 할 수 있을 때, 그럴 수 있을 때, 그때 내가 네 복수를 도울 거야. 반드시."
777의 말에 776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멍한 표정으로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842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리곤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어? 그러고 보니, 아저씨?"
777이 776을 다독여주다 842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777이 842의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자네도 자리로 돌아가지.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러나 842는 777의 말엔 아랑곳 않고 손가락으로 777을 가리키며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이 아저씨 기억난다! 기억나! 저년이 쉘터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이야길 꺼내니까 이제야 다 기억이 나네!"
777이 목소리를 높여 다시 842에게 쏘아붙였다.
“이봐! 그만하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아저씨?"
"뭐야?"
"아저씨 쉘터 동문 쪽에 있었잖아요. 그렇죠? 이제 기억나네. 이제 보니 내 눈에 익은 게 저년이 아니라 아저씨였구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자리로 돌아가!"
"하하- 아이고 무서워라. 역시! 살인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뭐.......라고?"
777의 눈에 당혹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842가 당황하는 777의 모습에 더욱 기세가 올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아저씨 어디서 봤나 했다."
842가 이번엔 바닥에 주저앉아 의아한 표정으로 842와 777을 번갈아보는 776을 향해 쏘아붙였다.
“야 이년아! 네 죽은 친구들이야 복수하겠다면서 숟가락 들고 설치는 너 같은 거라도 있지! 저 아저씨한테 당한 아줌마 복수는 누가 해주냐?”
이번엔 776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무슨 말이야?”
"닥쳐!"
777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842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주 여유 있게 뒤쪽의 사람들까지 들리도록 더욱 큰 목소리로 777과 776, 사람들을 번갈아보면서 말했다.
“자자 들어보라고- 이 아저씨 말이야. 동쪽 문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지.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어떤 아줌마 하나가 살아보겠다고, 이 아저씨가 자고 있던 텐트에 들어간 거지. 다들 밤에 얼마나 추운지 알지? 근데 이 아저씨가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지금처럼 저렇게 온화한 표정으로 다독여줬을 거 같아? 텐트에 자리를 내줬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 내쫓는 것도 모자라 그 연약한 여자를 말이야..............”
842는 일부러 말꼬리를 흘리며 뜸을 들였다. 777의 당황하는 얼굴에 희죽 웃더니 말을 이었다.
“........목 졸라 죽여 버렸어! 문도 활짝 열려 있었는데 전혀 개의치 않더군. 눈은 벌겋게 충혈 되서는 아주 대단하더라니까? 하- 그 장면도 잊을 수가 없어! 죽은 여자를 내다버리려고 끌고 가던 아저씨 모습 말이야. 참 뭐랄까- 무시무시했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777이 소리쳤다.
“그만! 그만둬! 그땐........ 그 여자가..... 그 여자가 먼저 날 공격했어! 죽이려고 했어!!!”
842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야 내가 알 바 아니고. 어쨌든 당신은 살았고, 죽은 건 그 여자잖아."
"닥쳐!"
"아차! 그리고 아저씨가 지금 모르고 있는 거 같아서 하나 말해주는데 말이야......."
842가 또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익살맞은 표정으로 잔뜩 일그러진 777의 얼굴을 놀리듯 마주보았다. 그리곤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가 그 아줌마 시체를 끌고 갈 때 말이야. 멀찍이서 누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알아?”
“뭐.......?”
“당신이 죽인 그 여자! 그 여자 아들이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이제 한 다섯 살이나 됐을 법한 애였는데, 잔뜩 겁에 질려서 엄마를 죽인 살인자가 엄마의 시체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가는데도 바지에 오줌을 지리면서 울기만 하더군. 엄마를 죽인 살인자! 바로 당신이 행여 울음소리를 들을까 무서워서 제 입을 틀어막고 말이야!”
842에 말에 777이 크게 당황하여 소리쳤다.
“뭐....뭐? 거....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
842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난 내 욕구에 솔직한 만큼이나 거짓말도 싫어해. 아저씨, 그리고 너 776!”
842는 이번엔 776을 향해 말했다.
“이런 세상에 둘도 없는 이기적인 년아! 복수? 복수라고? 배부른 소리 마. 너야 여기서 배불리 처먹고 잘 자면서 연애질까지 하고 있잖아. 그것도 모자라 복수할 기회라도 있지. 그 어미를 잃은, 그 꼬마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앙?”
776은 이제 완전히 울음을 그치고 허탈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완전히 혼이 나간 듯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어쩌면 776은 777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776은 쉘터 밖에서 복수가 목적이든 뭐든 이미 한 번 살인을 했다. 777은 842와는 다른, 나아가 자신과는 다른 그런 사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좀 더 대단한, 성품이 고매한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도 싹텄을 것이다.
그러나 842의 폭로는 776의 그런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었다.
777은 큰 충격을 받은 776을 보고는 다시 842에게 말했다.
“그만....... 그만해.......”
842는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더욱 큰 목소리로 777을 잔뜩 노려보며 말했다.
“살인자가 잘난 척 훈계를 하고 옷을 입으라마라....... 참 역겹다. 아저씨가 죽인 아줌마 지금쯤 썩어 문드러졌겠죠? 어쩌면 그 꼬마도요. 아저씨는 배불리 먹고 젊고 예쁜 년 만나서 키스나 하는 동안 말이에요. 그렇죠?”
777은 분노와 혼란에 휩싸여 이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842는 희죽 웃더니 이번엔 다시 주저앉은 776쪽을 보며 말했다.
“네 친구를 왜 죽였냐고 물었지? 뭐 살인도 인간이 가진 본성의 일부인가보지. 식욕, 성욕 같은 건가 보지. 마침 여기 딱 그 증거가 있네. 너도 나도 그리고 저 착한 척 하는 아저씨도 모두 살인을 했지. 거기다 다들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될 걸 죽였다- 이거야. 참 그러고 보니 아까 네가 말했었잖아. 너도 내 친구를 죽였다며? 그럼 서로 비긴 거 아니야? 그런데 뭐? 무슨 복수? 완전 이기적인 년일세!”
777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777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만하라고!!!!!"
777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842에게 달려들었다. 776은 그런 777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777은 기세 좋게 돌진했으나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쉘터에서도 그랬듯 842는 777의 공격을 여유 있게 피해내더니 주먹으로 달려드는 777의 목젖을 후려쳐버렸다.
"컥!"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777은 목을 부여잡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777이 달려들자 842도 흥분을 했는지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멀리 떨어져 서서 그런 그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777은 고통에 겨워 주저앉아 컥컥대는 와중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보음이 울리지 않고 있었다. 빨간 불빛도 점멸하지 않았다.
842가 777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777의 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777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842는 이제 완전히 흥분을 했는지,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 777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고 걷어차고 짓밟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퍽!
한참동안 842의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방안의 누구도 842를 말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그러는 내내 경보음도 불빛도 없었다. 776은 넋이라도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842가 무자비한 폭력을 멈추었을 때, 777은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죽은 듯 바닥에 쓰러져 가냘픈 숨을 내뱉고 있었다.
아직도 ‘그들’은 경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쉘터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 '그들'은 규칙을 적은 종이쪽지 같은 것도 놓아두지 않았었다.
842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대며 먹잇감을 찾듯 푸른 눈으로 주변을 쏘아보았다. 쓰러진 777이 겨우 고개를 들어 퉁퉁 부어올라 감긴 눈을 살며시 떴을 때 777은 잔뜩 발기되어 꼿꼿하게 위를 향하고 있는 842의 성기를 볼 수 있었다. 842는 성큼성큼 어딘가로 걸어갔다.
777은 다음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777은 끙-하는 신음을 내며 멀어져 가는 정신을 다시 부여잡았다. 한참 애를 쓴 뒤에야 자꾸만 감기는 눈을 겨우 다시 뜰 수 있었다.
어디선가 가냘픈 신음과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777은 조금씩 고개를 움직여 퉁퉁 부은 눈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포개진 벌거벗은 나신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조금씩 초점이 맞아갔다.
777은 곧 아래 깔려 있는 것이 벌거벗겨진 776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쪽에서 776을 짓누르고 있는 커다란 구릿빛 나신이 842라는 것도 말이다.
“어.... 어어어어..........”
777은 온몸에 힘을 쥐어짜냈다. 허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평평한 바닥을 부질없이 긁어대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842는 776을 짓누르며 보란 듯이 강간하고 있었다.
777의 눈에 그 뒤쪽으로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반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있었고, 반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어어...........”
그때였다.
777은 땅으로 꺼지듯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실제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아래로 추락해갔다. 동시에 포개져 있는 776과 842가 그 모습 그대로 공중으로 붕 뜨며 자신과는 반대방향으로, 위쪽을 향해 빨려 올라가듯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들도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776의 체념한 듯 보이는 마지막 얼굴이 보였다. 얻어맞았는지 여기저기 멍이 들고,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물로 가득한 776의 눈에서 깊은 슬픔과 고통을 엿볼 수 있었다.
777은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무기력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777은 그만 다시 눈을 꽉 감아버렸다. 차가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