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작용
오랜만에 날씨도 좋고 호수공원에 남자친구랑 놀러갔다. 집에서 돗자리를 준비했고 근처 백화점 지하에 들러 맛탕이랑 밀크티를 샀다.
평일인데도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잔디밭 곳곳에 벚꽃들이 떨어져 너무 예뻤다.벚꽃나무 아래 사람들이 돗자리를 폈다. 마음에 드는 나무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 소녀들, 정자 위에서 아래 풍경들을 찍으시는 어르신.
좋은 자리들은 이미 사람들이 잡고 있어서 아쉬워하던 중 자리를 찾다 한곳을 발견했다. 자리를 펴고 누웠다.
와.. 너무 좋다.. 바람도 꽃도 햇볕도..
예전에 돗자리 갖고 놀러왔다가 남자친구랑 싸운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싸우지 말자고 말하며 서로 웃는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갈등 조짐이 생기자 "이 돗자리가 이상한 것 같아." 하며 화제를 돌린다. 로이킴의 달콤한 노래도 듣고, 이상한 팝도 들었다.맛탕을 꺼내 밀크티와 함께 먹으며 오랜만에 즐거운 점심을 보냈다.
옆쪽에 한 남자어르신과 여자어르신 5명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남자분이 ‘나는 여복이 많다’며 웃으셨다. 남자친구가 웃는다. 책도 볼까 해서 가져갔지만 바람은 아직 조금 차가워 30여분 놀다가 일어나 공원을 걸었다.
공원을 거니니까 또 새롭게 좋았다.
나무에 있는 벚꽃도 너무 예쁘지만 떨어진 벚꽃도 너무 예쁘다. 폈을 때와 떨어질 때, 떨어 지고 나서도 예쁜 벚꽃, 이런 꽃이 또 있을까. 색을 잔뜩 머금은 향기로운 눈을 봄날에 보는 것 같아 참 좋았다. 언젠가 일본에 가서 벚꽃을 꼭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남자친구가 잠깐 화장실에 갔다.
핸드폰을 보니 언니로부터 부재 중 전화가 떠 있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가 부산에서 서울 오는 차편에 대해 물어 보았다. 차편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꽝' 하고 앞에 뭔가에 부딪쳐서 뒤로 발랑 자빠졌다.
일어나보니 앞에 가로로 굵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가 있었는데 내 키보다 낮아서 보지 못하면 부딪칠수 있는 나무였다.
언니한테 나무에 부딪쳐 자빠졌다고 하니까 "네가 몇살이냐.모자라냐."고 한다. 딴 때 같았으면 기분이 나빴을텐데 오늘은 별로 기분은 안나빴다.
단지 머리가 아팠다. 남자친구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괜찮냐며 하며 웃는다.
나도 같이 웃는다. 나도 웃겨죽겠다.
모자때문이다. 모자가 내 눈앞을 가려서 미처 앞에 나무를 못본 것이다.
모자는 남자친구가 최근에 사준 것이다.
괜히 남자친구 탓을 해본다. ㅋㅋ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다. 나무에 부딪치기까지 여러 상황과 요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가지라도 없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만약 내가 전화통화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가지 않고 남자친구를 기다렸다면,
내가 언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모자를 쓰지 않았다면,
내가 주변을 잘 살폈다면
이 중 한가지라도 일어났다면 아마도 나무에 부딪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다.
영화에서 여주인 데이지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나는데 그 교통사고가 일어나기까지 택시기사, 점원직원, 택시에 탄 손님 등 많은 사람과 상황들이 서로 엮어 있다. 그래서 그 상황 중 한가지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 부분에서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삶은 무수히 많은 상호작용의 연속이다. 우연히든 고의든 누구도 그걸 막을 수 없다.”
오늘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문득 그 영화가 생각났다. 그리고 명상수업에서 들은 종소리에 관한 이야기도.
종소리는 종과 종을 치는 사람, 종을 치는 행위, 공간, 막대기 등 여러조건의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와같이 모든 것은 조건지어져 일어났다 살아지는 것이라고.
어떤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한가지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조건만 달라져도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오래전에 한 사람과 크게 싸운 후 오랫동안 몸과 마음이 넘어진 상태로 있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찾고자 계속 노력했고, 한가지 원인이 알게 되면 또 다른 원인을 찾고 있었다. 지나고 나서 보면 그 일은 한가지 원인에 의해 일어난 일도 아니고 꼭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도 아니다. 여러가지 상황과 조건들이 다 얽혀서 일어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부분도 분명히 있다.
아직까지도 그것이 완전히 받아들여지진 않지만 이제는 전보다는 좀 더 가벼워진 거 같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장난치며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전거를 비틀비틀 하니까 남자친구가 ‘또 자빠질라’ 한다. 그런 남자친구에게 ‘자빠지면 또 일어나면 되지’ 한다.
그래도 넘어지지 않게 '잘 살피고 조심은 해야겠다' 생각 한다.
몸과 마음을 항상 가볍게 하는 게 중요하겠져?
네 맞아요 가볍게 유지하면 어떤것도 스르륵 지나갈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