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플로베르 - 순박한 마음

in #gustaveflaubert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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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가 제시하는 삶은 모두 순교에 가깝거나, 순교다. 단편집 제목인 <순박한 마음>은 순교로 승화되는 삶의 정수이며, 그 자체가 성스러운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 따라서, '순박한 마음'을 지닌 이들은 삶 속에서 흔들리기는 하지만, 순교로 마무리되는 여정에서 아주 멀리 이탈하지 않을 수 있는 일종의 '여력'을 소유한 셈이 된다. 한가지 더 눈여겨 보고 싶은 점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자기중심적 해석으로 꾸려나가며 개인적 구원을 성취해 나간다는 것이다.

단편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삶-이야기마다 극명히 갈리는 종류는 삶-을 필사적으로 살아내는데에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의심하는 현대인의 자기검열적 증상에는 일말의 여지를 내주지 않는다. 이러한 집중이 만들어내는 것은 삶이 일으키는 비논리적 사건들에 대한 자기중심적 해석이다.

우연이 일으키는 온갖 비극에 대응하는 인간의 본능적 반응이 해석이라면, 배우지 못한 하녀 펠리시테, 부모를 죽인 성자 쥘리앵, 메시아를 예비하는 예언자 요카난은 사건의 비극성에 처절하게 달려들어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극도의 자기중심적 해석을 감행한다.


하녀 펠리시테는 버림받은 유년기, 실패한 사랑, 자식같던 아이들의 죽음 속에서 앵무새로 발현되는 성령의 형상화에 매달린다. 그리고 주변인들을 챙기며 주인을 모시는 일이 최대의 과업임을 변함없는 일상으로 선언한다. 성자 쥘리앵은 학살자와 정복자의 삶, 부모를 죽인 삶을 거치며 스스로를 죽이는 대신 나병 환자를 맨살로 껴안고, 예언자 요카난은 본인의 죽음을 직감한 채, 핍박하는 자들의 치부를 잘근잘근 씹어대듯 외친다. 이것은 개인이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마주했을 때 휘두를 수 있는 최대이자 최고의 운동량이다. 여기에는 의식적인 선악추구나 의도적 반응이 없다. 합리적인 판단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죽을 때 까지 하는 것. 전자가 객관적 해석이라면, 후자가 자기중심적 해석이다.


플로베르의 서사가 독자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자기중심적 해석이 개인적 구원을 성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펠리시테는 임종을 맞이하는 침상에서 앵무새로 강림하는 성령을 만나고, 쥘리앵은 예수와 함께 푸른 공간으로 날아간다. 요카난은 잘린 머리의 무게로, 자신의 길을 전수하는 이들의 발걸음에 동력을 심는다. 결국, 그러한 구원이면 충분한 삶이라고 독자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했고, 우리는 플로베르의 인물들에게 '그만하면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돌아보지 않고, 의심하지 않은채 묵묵히 돌진하는 '순박한 마음'이 삶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 마음이 몇 번이고 '달리다굼'의 위력을 행사한다. 적어도 플로베르의 이야기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