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시간 - 삶이 흐르는 모양을 따라서
부재의 시간──────────
삶이 흐르는 모양을 따라서
얼그레이 케이크
2년 전, 운전을 하다가 허기가 져서 선물 받은 쿠폰을 쓸 겸 어느 카페에 들렀다. 어떤 빵을 먹어볼까 살펴보던 중 '얼그레이'로 만든 조각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홍차로 만든 케이크라니, 별 기대는 없었지만 웬일인지 다른 디저트는 그다지 끌리지가 않았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포크로 조금 덜어내어 케이크를 처음 맛보았을 때, 은은한 단 맛 위로 퍼지는 쌉싸름한 얼그레이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진한 커피는 얼그레이가 섞인 크림을 입에서 말끔히 씻어주었고, 얼그레이 향은 커피 원두 향기 속에 은근히 숨어 마치 겨울의 기억처럼 남아 있었다.
그 뒤로 아무런 기척이 없다가 느닷없이 '얼그레이 케이크'의 감각이 되살아난 것은 3일 전의 일이었다. 주말을 포함한 나흘 동안 일하거나 작업하지 않으면 아침이든 낮이든 상관 없이 잠이 쏟아질 만큼 온몸이 피로감에 절어 있었다. 올해는 정말 직장일을 병행하며 나의 시간을 한계 끝까지 썼던 해였다. 연초에는 개인전과 그룹 사진전 준비를,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여름에는 기록에 대한 북토크와 의뢰 받은 사진 기록 작업을 하느라 주말과 퇴근 후 저녁 시간까지 할애했고, 그나마 숨을 돌릴까 기대했던 가을에는 백신을 맞은 뒤 펑펑 쏟아지는 부정출혈로 생사를 오갔다. 가을과 겨울까지 이어지는 기록 작업을 조금씩 이어가며 회사의 바쁜 일정들도 함께 맞이하다보니 어느덧 12월. 당 충전이 절실한 기분이 들었지만 무작정 단 음식들 보다는 몇 년 전 먹었던 얼그레이 케이크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미루고 미루던 직장인 건강 검진을 받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낸 날, 기억을 더듬어 예전에 얼그레이 케이크를 먹었던 카페 브랜드와 '얼그레이 케이크 맛집'이라고 뜨는 동네 근처 양과점을 찾아갔다.
"혹시 얼그레이 케이크 있나요? 되게 예전에 먹었던 기억이 나서요."
"아, 얼그레이 케이크는 없어요. 예전이라면 아무래도 시즌 메뉴가 나왔을 때 드신 것 같네요."
"에고 어쩌나. 이번에 생딸기 케이크로 메뉴가 바뀌었어요."
그때처럼 다른 디저트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른 케이크라도 사오지 그랬냐는 엄마의 말에 '그게 아니면 안돼.' 라고 대답했다. 배달 앱에 메뉴 검색 기능이 있다는 게 기억났고, 결국 꽤 흔하고 유명한 브랜드 베이커리에서 단 하나 남아 있는 초코 얼그레이 케이크를 데려올 수 있었다.
시간적 거리두기
문득 생각난 얼그레이 케이크처럼 어제 스팀잇 블로그가 생각났다. 고팍스에 STEEM과 STD가 상장 폐지되어 더 이상 거래할 수 없게 된 줄도 모른 채로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 묶여 있던 STD를 이곳으로 보내고 새로운 거래소에 계좌를 트고 나서야 몇 년 전 시세의 3배 정도 되는 가격으로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집에서 지폐 뭉치를 선물처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의 온 존재를 다해 기록하던 시절이 이곳에 발자국처럼 남아 있다. 그동안은 그때의 시간들을 흔적이라도 다시 마주하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조금씩 글은 쓰고 있었지만 한참 이곳에 연재를 할 때처럼은 열렬히 써내지 못했다. 망망한 여행을 떠나 있을 때도 명백히 깨닫고 있었다. 인생에 다시 없을 텅 빈 시간이라는 것을. 공백 기간, 부재의 시간은 시간적 거리두기였다. 서로의 존재를 응원하던 친구는 운 좋게도 자신의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얼그레이 케이크' 같은 존재를 만나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어디선가 그렇게 흘러 들은 것 같다. 이 부재의 시간 동안 나는 좋아하는 일에 실체를 더하는 작업을 하며 물음표 가득했던 꿈들을 작지만 확실한 현실로 만들어갔다. 이렇게 전력 질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원하던 여행이 이후의 삶을 견인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젠가의 얼그레이 케이크를 향해
일상이 끝도 모를 코로나의 장막에 덮였고,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었던 낯선 곳으로의 여행길도 오르기가 쉽지 않아졌다. 언젠가 다시 낯선 언어의 나라로 떠나게 되는 날, 여행의 아주 작은 요소들 속에서 마음껏 풍미를 길어 올리고 싶다 마치 얼그레이 케이크 속의 작은 찻잎 조각들을 음미하는 것처럼. 아끼는 카메라를 들고 1분이 영겁으로 머무는 걸음 위에 놓이고 싶다. 바라는 모습이 선명하다면 삶은 그 길로 흐른다. 의지와 우연이 뒹굴며 그저 묵묵히 흐른다. 지독히도 텅 빈 시간을 향유하고자 노력하는 시간 속에서 2022년은 나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