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쇠를 당겨라(셔터를 눌러라)

in #kr-art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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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난주 목요일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에 있는 비비스페이스(BIBI space)를 찾았다. 비비스페이스 김춘화 대표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비비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여서 우리는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난 이탈리아의 전통 요리인 해산물 리소토(Risotto)를 주문했다. 꿀맛이었다. 우선 비주얼 측면서 쌀알에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쌀은 시각적으로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지만 쌀맛은 부드러우면서도 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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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리소토에 첨가된 해산물은 싱싱한 식자재를 쓴 까닭인지 달콤하고 고소하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맛을 냈다. 한 마디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내가 점심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실 때 김태정 작가와 작품이 도착했다. 오랜만이었다.

그러니까 2010년 여름 난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모바일아트’를 기획 준비하느라 바빴었다. 당시 비비스페이스 김춘화 대표가 나에게 전화를 해 ‘비비스페이스에서 사진작가가 첫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작품 디피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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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하던 일을 멈추고 인천에서 대전으로 갔다. 비비스페이스 김 대표와 김태정 작가가 전시장에 작품들을 펼쳐놓고 어떻게 디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비비스페이스 전시공간은 심플하면서도 천고가 높아 작가라면 한 번쯤 개인전을 하고 싶은 전시장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작품 디피하기가 까다롭다. 자칫하면 작품이 전시공간의 힘에 기가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의 성격과 전시공간의 특성을 고려해 적절한 연출을 고려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8년 후 김태정의 세 번째 개인전이 비비스페이스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그의 신작은 일명 ‘초상사진’이었다. 작품 포장지를 벗기니 섹시한 여성들이 등장했다. 총 29명의 20대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전시 타이틀은 <작별의 날(Days of Farewell)>이었다. 작별의 날? 무엇으로부터 작별이란 말인가? 누구와 작별한단 말인가? 머시라? 혹 김태정 작가가 29명의 사진 모델들과 작별을 고하는 날이 아니냐고요?

문득 2006년 비비스페이스에서 기획했던 <방아쇠를 당겨라!>가 떠올랐다. 난 당시 대한민국 현대사진의 흐름을 살펴 보기위해 15명의 사진작가(강홍구, 구본창, 김경덕, 김상길, 노순택, 문형민, 배병우, 이강우, 이윤진, 이현우, 임선영, 주명덕, 조습, 최원준, Area Park)을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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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 그들의 작품론을 담당할 18명의 평론가(smellliket, 김복기, 김영진, 박준헌, 신혜영, 유혜성, 육영혜, 윤제, 이미정, 이수정, 이영준, 이은혜, 이정우, 이지호, 이준희, 정민영, 조선령, 호경윤)을 공동집필자로 초대했다. 난 당시 전시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방아쇠를 당겨라? 이건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겨라’는 말도 아니고, ‘조준만 하다가는 맞출 과녁이 사라지고 말게 되니 방아쇠를 당겨라’는 말도 아니다. 그럼 모냐? ‘방아쇠를 당겨라!’는 일종의 ‘셔터를 눌러라!’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사진작가는 어떤 ‘풍경’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물론 그 ‘풍경’은 단지 산이나 소나무밭‘ 등 자연적 풍경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다양한 풍경도 내포한다. 모든 풍경은 바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그 변화하는 풍경을 향해 사진가는 방아쇠를 당긴다(셔터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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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사진가의 시야로부터 사라져(지나)가는 풍경은 죽는다. 아니다. 그 풍경은 부활한다. 모순되게도 지나가는 풍경은 죽음으로써 가능케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자신의 이미지를 죽음에 맡기는 것이 풍경의 살아가기(living on)란 말인가?

사진은 그 지나가는 풍경을 죽임과 동시에 살린다. 그러면 그 사진은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시체가 아닌가? 그것은 지나간 혹은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과거가 아닌가? 돌아가신 바르트(Roland Barthes)의 어머니는 사진의 세계에서 살아계신다(물론 이제 우리에게 바르트도 사진 속에서만 살아있다).

사진은 산자를 죽임과 동시에 죽은자를 살린다. 아직 죽지 않은 산자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자도 사진을 통해 살아있는 시체로 출현한다. 마치 유령(das spectrum)처럼. 유령? 살아있는 시체말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진은 스펙트럼(spectrum)을 통해 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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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유령(spectre)으로 나타난다. 바르트는 <밝은 방(La chambre claire)>(1980)에서 사진의 스펙트럼(spectre, spectrum)을 구경거리(spectacle)와 구경꾼(spectateur, spectator)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읽었다.

따라서 사진의 스펙트럼(spectrum)은 사진의 유령(spectre)과 이중 놀이를 한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바르트의 읽기를 확장했다. 그는 형용사 유령같은/스펙트럼의(spectral)를 명사화했다. 그리고 그걸 ‘사진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유령의 뜻으로 사용되곤 하는 revenant라는 단어도 삽입시켰고. 그건 바르트가 말했던 이름뿐인 나라(명부, 저승)부터 회귀된 시체이다. 데리다는 그 회귀된 시체를 나타남(revelation)과 놀이했다.

드러냄(revelation)은 데리다에게 호감을 주는(revenant) 것이기도 하다. 그 호감을 주는 것은 오래간만에 다시 나타난 사람(revenant)이기도 하면서 유령(revenant)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진은 시체로서 살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시체는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살아있는 시체이다. 허나 그 ‘살아있는 시체’가 유기체의 신체로 살아있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기관-없는-신체’로 살아있다고 말해야 타당할 것 같다. 그러면 사진은 단지 대명사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명사이기도 하잖은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명사는 대명사가 대리한 명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명사(사진) 그 자체를 뜻한다.

이를테면 어떤 풍경사진은 어떤 풍경을 찍은 것이란 점에서 그 풍경의 대명사(pronoun)이고 동시에 그것은 스스로를 발음하고, 음독하고, 언명하고, 표명하고, 단언하고, 공언하고, 의견을 말하고, 판단을 내리고, 선언하는(pronounce) 사진 그 자체로서의 명사(noun)라고 말이다. 따라서 낯익은 풍경은 낯선 것으로 우리 앞에 출현하게 될 것이다.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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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줄 알았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