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경우 문화가 되살아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
서구의 경우 문화가 되살아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서로마 멸망 후 샤를마뉴 대제 정도에 들어서야 ‘다시’ 만들어진다. 그게 로마네스크 양식(10세기~12세기 정도)이다.
물론 그 이전 백 년 정도 준비 기간이 있었다. 그 시기를 대개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부른다. 6세기부터 거의 정기적으로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는 8세기에 물러간다. 끔찍한 전염병으로, 전쟁으로 아마도 그 이전에 비해 삼분의 이쯤 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아랍의 무슬림들은 유럽의 미개인들을 향해 혀를 찼을 정도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끔찍한 상황은 정리되기 시작하고, 샤를마뉴대제가 교황과 손잡고 정치를 안정시켰으며 ‘고대 로마’를 베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만들어진 에보의 기도서Ebbo Gospels를 보면 표현주의적인 기법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서툴긴 하지만.
회화의 기법은 비잔틴에 ‘보존되어 있던’ 아이콘에서 배워온 것으로 보인다(곰 선생이 이렇게 주장하고, 다른 여러 자료를 보건대 그런 진단에 동의가 된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는지 모르겠다). 베네치아는 비잔틴 지역이었던 동방과 많은 것을 교역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는 서로마가 망한 뒤 비잔틴 통치 지역이었던 곳도 있었다.
그런 전통은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스페인의 알라리크 2세Alaric II의 <성무일도서>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샤를마뉴는 나이가 들어서 ‘읽고 쓰기’를 배우려고 무척 애썼다고 한다. 학자들을 불러 모았고, 책 읽어주는 것을 즐겨 들었다. 그는 잔인한 정복자였지만 그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된다는 것도 알았던 모양이다.
‘문화’를 융성시키기 위해 애썼다. 필사본 제작만이 아니라 각 지역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샤를마뉴 자신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직접 읽고 쓸 수 없었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
몸을 너무 많이 쓰면 아무래도 ‘문화적인 감각’은 떨어지나 보다. 나는 어린 시절 그럭저럭 몸을 잘 썼지만 책에 집중, 특화(?)되고부터는 몸치가 되어갔다. 그래도 점점 더 책이 좋다. 잘 쓰여지고 잘 만들어진 책이.
** 그림 모두 8세기후반에서 9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들이다. 맨 앞의 그림은 대략 반 세기 정도 지난 그림이고, 그 뒤의 그림은 마지막 그림보다 이삼십 년 정도 앞선 시기의 그림이다. 어쩌면 비슷한 시기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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