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표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으면 기억력이 나빠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겪는 건 다르다. 나는 요즘 사람과의 대화를 잘 잊어버린다. 상대의 말을 잊고, 내가 했던 말을 잊는다. 덕분에 같은 말을 다시 하는 경우가 많다. 말을 뱉고 전에도 했던 말이라는 걸 뒤늦게 떠올리는 건 꽤 끔찍한 경험이다. 평소에 그 현상을 억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작은 새로운 것들을 해왔지만 요즘은 그것도 하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정말로 하는 게 거의 없다. 그렇게 책상 앞에 오래 붙어있는다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많은 상황에 무작정 몰두하는 건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무시하고 스스로 부정적인 현상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계속 침전하는 건 분명 건강하지 않다. 분명 건강하지 않은데 마음은 편안하다. 한순간의 번뇌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24시간 중 23.7시간 정도는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16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 기준이라는 건 수면 중에도 평온하다는 말이다. 5개월 전에도 자고 싶으면 잘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기록을 남겼는데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안경을 바꾸고 안구 피로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오락가락하는 소양감만 완전히 가라앉는다면 육체적으로도 불편함이 없다.
잃은 게 있고 얻은 것도 있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린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었을 뿐이니 무엇이 더 무거운지를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다고 해도 나는 그 무게를 비교하며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나아가야 할 방향은 진작에 정해졌고 나는 따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