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세이] 우선순위에 대하여
우선순위에 대한 썰을 풀기 이전에, 일단은 제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사과말씀을 드리고 시작해야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은 딱히 재미도 없고 교훈도 없는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길게 늘어놓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지금 읽으신 세 줄 가량의 글에서 벌써 눈치 채셨을 겁니다. 그런데도 제 글을 읽어주실 마음이 나셨다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뭐 전부 쓸데없는 얘기니까 각설하고, 우선순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솔직히 말해서 이십대 초반까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단어입니다. 충동적으로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면서 태평하게 이십 대 초반을 보내다가, 어슬렁어슬렁 대학원에 들어와서 벌써 스물여섯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해야 될 일이 생각나면 즉석에서 해치워버리는 타입이여서 우선순위가 생길 틈이 별로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미 했거나, 아니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거나, 보통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이십 대 초반까지는 그런 라이프 스타일로도 그럭저럭 잘 살아오고 있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다보니 확실히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 필요한 것 같기는 합니다. 일이 정말 겁나게 많거든요. 골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한강물에 가서 빠져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살아가기는 해야겠으니, 쓰레기처럼 널려져 있는 무수히 많은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한 달간 치우지 않은 방을 청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전체적으로 슥 방을 둘러보고, 이건 뭐야, 이딴 게 왜 방에 있지, 이런 느낌으로 쓸 데 없는 일들은 그냥 쓱쓱 구석에 밀어버리면 됩니다. 정말 힘든 것은 중요한 일과 더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심오한 고뇌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지금 논문을 쓰는 일과 우선순위에 대한 글을 쓰는 일 중에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시는 걸 보니, 저는 후자를 선택한 모양이군요(하하). 하지만 이런 종류의 선택과 고민은 사실 별로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는, 귀여운 수준의 고민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선택 때문에 잃게 되는 결과가 크면 클수록 선택은 고통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저도 살면서 몇 가지 그런 경우를 겪어 온 것 같습니다. 불합리한 일을 목도했을 때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나의 미래에 큰 타격을 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용기를 내어 이야기할 것인가 아니면 침묵할 것인가. 사랑하지만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과 이별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식는 마지막 순간까지 만나 볼 것인가. 이 직업을 계속해서 갈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걷어치우고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인가. 이런 종류의 고민들은 삶에 대한 과단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큰 고통이 찾아와서, 그 고통이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흐리고 의지를 꺾습니다.
그렇게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이 들 때면, 저는 안개 낀 숲 속의 나무 그루터기에 홀로 앉아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나무의 흔들림, 작은 바람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것은 제게는 상당히 강렬한 정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기분이 평온해지고, 저는 긴 침묵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안개 낀 숲 너머에서 작은 그림자 같은 형체 하나가 서서히 다가옵니다. 그 그림자는 제 코 앞까지 가까이 다가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집니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것이 너의 삶의 본질에 가까운가? 네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 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림자의 질문에 대답해 가는 동안, 저는 차츰차츰 삶의 원형에 대해 추적해갑니다. 조각가가 뭉뚝한 대리석 속에서 아름다움의 원형을 찾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림자와의 대화는 길어서, 어느 새 밤은 가고 점차 날이 밝아옵니다. 안개가 걷혀가고, 환한 태양 빛이 어두운 숲들의 그림자와 나무 사이를 광선처럼 뚫고 지나갑니다. 저는 태양이 이토록 눈부셨던가, 라는 생각을 하며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환한 태양 사이에서는 가야 할 길이 명확히 보입니다. 저는 그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또 다른 밤과 또 다른 낮이 찾아오며, 삶은 계속해서 순환합니다. 이 끊임없는 삶의 순환, 선택의 불확실성, 태양의 눈부심과 기나긴 침묵, 그 모든 것을 저는 사랑합니다. 제가 내린 선택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저를 더 저답게 만들어주는 길이라면, 그 정도의 무게는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좀 더 제 삶의 본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매일매일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은, 삶의 본질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이자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각자가 삶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고 감당해나갈 몫이겠지요. 이래저래 길게 얘기했지만 한 마디로, 최대한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내 맘대로 살자는 주의입니다. 대학원 왔다고 딱히 제 성격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고, 원래 생겨먹은 대로 제 맘대로 결정하면서 살고 있습니다(껄껄).
우선순위에 대한 이야기지만 우선순위라는 단어는 몇 번 안 나온 것 같은데, 뭐 이것도 그런 데로 괜찮은 것 같군요. 아주 충분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이제 안녕.
기본적으로 kr 태그를 넣어주셔야 사람들에게 노출될 확률이 큽니다. 메인태그는 kr을 넣어주시고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제멋대로 엮은 태그)하드포크 이후 글이 너무 많이 올라옵니다.포스팅에 맞는 태그를 설정하시길 권합니다.(06.30)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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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감사합니다~~!!!!! ㅎㅎ
어떻게 살 것인가. 정말 죽을 때까지 고민할 문제인 것 같아요. 나 다운 선택이 나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면, 저도 쿠키님처럼 그 무게를 감당해내야겠습니다ㅎㅎ
가나님이라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요~ ! :)
선택이란 참 어렵네요 ㅠ
그러게 말이에용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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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끊임없는 삶의 순환, 선택의 불확실성, 태양의 눈부심과 기나긴 침묵, 그 모든 것을 저는 사랑합니다. '
읽다가 문장이 너무 예뻐서 감탄했습니다 ㅎㅎ
이런 글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으셨다니 저도 같이 기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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