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emit과 함께하는 한국사이야기 72) 영조 - 당파 싸움에 칼을 들다 [ 탕평책, 사도세자 ]/ Korean history
안녕하세요 @eunhaesarang입니다.
오늘 이야기 할 인물은 영조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724년 21대 국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조선 후기 왕 가운데 영조만큼 강혁한 왕권을 가진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게다가 무려 52년가 조선을 통치했으니 이처럼 장수한 왕도 흔치 않습니다.
인현왕후는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장옥정이 낳은 아들이 세자가 되었지만 장옥정이 사약을 받았기 때문데 세자 자격 문제가 거론 되었습니다.
소론은 장옥정의 아들을 지지했고, 노론은 또 다른 후궁의 자식인 연잉군을 지지했습니다.
숙종의 마음도 오락가락 했든데, 결국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1720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숙종은 세자을 왕에 오르도록 하고, 그 다음 왕에는 연잉군이 오르도록 유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이에 따라서 세자가 경종이 됐고, 그가 사망하자 연잉군이 영조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왕에 오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뻔도 했든데, 모든 게 당쟁 때문이라고 영조는 판단했습니다.
어느 한 당파가 득세하게 내버려 둬서는 당쟁을 없앨 수 없다고 판단을 합니다.
사실 자신을 지지한 노론에 더 우호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하지만 노론이라 해도 강경파는 멀리했습니다.
자신을 몰아내려는 소론 중에서도 온건파는 발탁을 했고요.
이렇게 해서 당과 균형을 맞춘 영조는 1727년 탕평(蕩平) 교서를 내립니다.
당파를 따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던 탕평책입니다.
나아가 1730년 노론과 소론의 거물을 한자라에 불러 화해하도록 주선을 하였고 정승 자리도 똑같이 두 당파에 나줘주게 됩니다.
당쟁과의 전쟁은 재위기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1742년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웠고, 1772년에는 같은 당파끼리는 결혼도 금지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철두처미했지만 당쟁의 휘말려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바로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는 1753년 세자로 책봉됩니다.
후궁 영빈 이씨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도세자란 이름은 훗날 영조가 잘못을 뉘우치며 붙여진 이름입니다.
나중에 정조는 이와 별도로 '장헌'이란 시호를 내립니다.
그래서 장헌세자라도 부르기도 합니다.
사도세자는 영특했습니다.
하지만 노론보다 소론에 어울린 게 화근이었습니다.
노론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노론은 세자의 허물을 왕에게 고자질을 했는데 그때문인지 모르지만 왕의 마음은 점점 세자를 떠나게 됩니다.
1762년 노른이 작심한 듯 세자의 잘못을 조목조목 고해바칩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는데, 겁에 질린 세자가 자결하지 않자 뒤주에 가둬버립니다.
8일 동안 물도 밥도 물도 주지 않아서 결국은 세자는 뒤주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자가 잘못한 점도 분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뒤주 안에거 죽음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당쟁을 잡겠다던 영조가 그 당쟁에 넘어가 자식을 죽이는 꼴이 되버린것이죠.
그렇다면 탕평책은 와전히 성공한했다고 할 수 없겠죠?
비록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 왕이지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 왕입니다.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게 됩니다.
당시 성인은 모두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군포를 내기도 했습니다.
균역법은 이 군포의 양을 2필에서 1필로 줄인 제도입니다.
또 고구마를 일본에서 수입해 구황작물로 활용토록 했고, 귀한 곡물을 술로 만들지 못하도록 금주령도 내리기도 했습니다.
신문고 제도도 부활을 하게됩니다.
이런 노력 때문에 나라가 많이 안정이 되게됩니다.
그를 이어 사도제자 아들인 정조가 왕이에 오르게 됩니다.
다음은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 정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영조의 탕평책, 사도세자 그리고 그의 업적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영조도 좋은 군주였지만 그의 탕평책은 50점에도 못미치는 것 같아요.
탕평책을 한다고 했지만 노론의 지원을 업고 등극한 왕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편 정조이야기가 기대되네요.^^*
18세기에 영조 같은 왕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다음 정조도 그렇고요. 하지만, 왕 주변만 변한다고 해서 나라가 변하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신하들 입장에선 이 두 시기가 억압의 시대였을까요? 정조대가 끝이나자, 신하들이 날 뛰기 시작하는데...ㅜ ㅜ
스팀아 4월을 멋지게 가보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