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바스티아 연재 특집] -초벌 번역- 정치경제학과 종교의 관계 / [경제적조화] 마지막 장

in #kr-newbie7 years ago (edited)

안녕하십니까? @jin90g 입니다.
오늘은 연재 특집으로 바스티아의 유고작 [경제적 조화 2]의 마지막장
정치경제학과 도덕, 정치, 입법 그리고 종교의 관계 초벌 번역을 올리는 날입니다.
물론 진지하게 번역하기 보다는 저의 똘기와 프랑스 책에서 흘러나오는 화려함과 중2를 필사적으로 살려볼까 합니다. 어쩌다 보니 학문 vs 종교 드립을 자꾸 치게 되는데... 이 글로 일단은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물론 일단은 철학전공자다보니 .... 견해나 제 관점을 여쭙고 싶으시다면 .... 아니면 학부 차원에서 분류체계를 물으신다면 성실히 답변해보겠습니다.


[경제적조화] 2권 마지막 장

[정치경제학과 도덕, 정치, 입법 그리고 종교의 관계]

<편집자 주석 : 저자는 불행히도 도덕, 정치, 입법 세 장에 관하여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장들을 잇따르는 이 장 ('종교')를 위한 소개를 제외하고는, 이 작업 계획에 포함되었다.>

현상은 언제나 두 다른 현상 사이에 놓여있는 것으로 발견된다. 하나는 현상의 '작용 원인(작용인)'이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상의 '목적 원인(목적인)'이다. 그리고 학문은 이 관계에 있어 전자건 후자건 은닉되어 남겨져 있는 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믿는 바, 인간 정신은 일반적으로 목적인을 찾아내는데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더 직접적인 종류에 대해 관심 갖기 때문이다. 달리 우리가 지닌 어떤 인식도 종교적 관념을 향하는 것 보다 더 큰 힘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는다. 그리고 달리 어떤 인식도 인간 심장의 모든 그 감성을 느끼는 데에, 신의 마르지 않는 호의에 대한 감사라는 생생한 감성을 느끼는 데에 더 알맞지 않다.

진실로,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김에 좋아하는 여러 가지 섭리의 의지에 그토록 친숙하게 한다. 우리는 눈과 귀의 기발한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함 없이 보고 듣는다. 태양빛, 이슬방울이나 비는 우리에게 그것들의 유용한 효과나 그것들의 감미로운 감성을 아낌없이 준다. 우리의 경이와 우리의 감사를 일깨움 없이 말이다.

이는 오로지 그 경이로운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연속된 행위와 관계있다. 왜냐하면 목적인은, 비교적 중요치 않은 것조차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기 마련이고, 식물학자가 우리에게 왜 이 식물이 그런 형식으로 작용하고, 왜 다른 것들은 이런 색깔을 띠는지 가르치면, 곧장 우리는 거기서 신의 역량과 신의 선함 그리고 신의 지혜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통찰하면서, 우리 마음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를 느끼기 때문이다.

'궁극적 목적의 영역'은 따라서, 인간의 상상에 있어 종교적 관념을 스며들게 하는 대기(환경·바탕)과 같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측면을 통찰하거나 예상한 후에는, 우리에게는 다른 관계 아래서 이를 연구해야 할 일, 말하자면 그것의 작용인을 탐구해야할 일이 남겨져있다.

그것은 기묘하나 때때로 우리에게 일어난다. 우리가 이 원인(작용인)에 대한 충분한 앎을 취한 후엔, 그것은 매우 필연적으로 우리를 결과에로, 우리가 처음에는 경탄해 마지않았고, 우리가 매우 오래도록 그 목적인의 성격에 대해 더 이상 분간해내기를 거부했던 그 결과(자연)에로 끌고 간다.

그리고 우리는 말한다. “내가 순진했지, 신께서 이런 구상 속에서 이런 배열로 마련했다고 믿을 만큼 말이야. 지금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주어진 것들로 발견해냈던 원인이야.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이지) 이 배열은 그 필연성 전체에 뒤따라야만 해. 이 배열은 섭리의 뜻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추상화(분리·추출)되어야 해”

그렇게 해서 불완전한 학문은 그 메스와 분석으로 이따금 우리 영혼 안에서 종교적 감성을, 자연의 순수한 광경이 태어나게 했던 그 감성을 파괴하러간다.

그것은 해부학자 혹은 천문학자에게 있어서 종종 보인다. 무지한 자들이 말한다. "우리 세포조직 안에 외부 이물이 침투될 때 마다, 그 존재가 있는 곳에 큰 피해가 일어나고, 염증이 그리고 배출을 향하는 화농이 자리 잡는 것, 이 무슨 경이로운 일인가! " - "아니다!", 해부학자들이 말한다. "그 배출은 전혀 의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농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리고 화농은 그 자체로 우리 세포조직 안의 이물이 존재함에 대한 필연적 결과이다.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러 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스스로 그 결과가 원인을 뒤따른다는 것을 분간하겠지, 그러나 그 원인이 그 결과를 초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고의로 배열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 앞선 원인의 필연적 결과인 한에서 말이다."

무지한자가 말한다. "신의 선견지명은 어찌나 감탄스러운지, 그 분은 비가 지면을 넘치지 않고, 마치 정원사의 물뿌리개로부터 오는 것처럼, 방울방울 떨어지도록 의도하셨도다. 그것 없이는, 모든 식물의 성장이 불가능할 것이다. " - "그대는 찬미에 헛된 비용을 쏟는군", 박식한 물리학자가 대답한다. "구름은 무슨 물층 이 아니다. 그런 것은 대기에 의해 떠받쳐질 수 없다. 구름은 비누거품과 닮은, 현미경에나 보일법한 기포 무더기다. 그것들의 두께가 늘어나거나, 그것들이 압축되어 터질 때, 그 무수한 작은 물방울이 비가 되어 내는 것이다. ~~~(블라블라)~~~ 만약 식물의 성장이 잘 된다면, 그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지, 신께서 우리에게 물을 거대한 물뿌리개로 체를 쳐서 보내기를 즐기신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과학으로 다소간의 그럴듯함을 줄 수 있고, 과학이 이처럼 원인들과 결과들의 연쇄를 검토할 때, 현상을 궁극 목적의 탓으로 빈번히 바치는 무지한자들은,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성의 빛 앞에서 그런 게 사라진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는 있다.

또한 처음에 우리가 전기에 대한 어떤 앎을 얻기 전에는, 사람들은 천둥소리에 의해 두려움에 떨며, 폭풍우 한 가운데에 울리는 그 위압적인 소리 안에서 천상의 분노의 징조를 거의 분별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물리학의 진보에 저항할 수 없었떤, 별것 아닌, 관념의 연합일 뿐이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현상이 인간에게 작용할 때, 그는 거기서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것을 발견하면, 그는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원인의 원인을 찾는 것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한다. 더는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을 때, 그는 멈춰선다. 그리고 말한다. “신이다, 그것은 신의 뜻이다.” 여기에 우리의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멈춰서는 시간은 다만 순간일 뿐이다. 과학은 발전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원인이, 눈에 띄지 않고 남겨져 있던 것들이 그 눈에 드러난다. 그때 과학은 말한다. : “이 결과는 우리가 믿었던 것 같이, 신의 직접적인 의지로부터인 것이 아니다. 내가 간파하는데 도달한 이 자연적 원인으로부터인 것이다.” - 그리고 인류는 그 발견에 정통한 후에, 말하자면, 그 믿음의 한계 눈금을 옮겨놓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자문한다. : “무엇이 이 원인의 원인인가?” - 그리고 그것을 보지 못하면, 그는 이 보편적 설명 속에서 고집한다. : “그것은 신의 뜻이다.” - 그리고 이처럼 무한정한 시대가 늘어선다. 과학적 계시와 신앙 행위(신앙고백)의 셀 수 없는 잇따름 속에서 말이다.

이 인류의 행진은 모든 종교적 관념에 대해 파괴적인 표면적 정신에 나타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에 따라 과학의 진보와 신의 후퇴가 생겨나지 않는가? 자연적 원인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에 따라 궁극 목적의 영역이 좁아지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불쌍한 사람은 이 아름다운 문제에다 그토록 협소한 풀이를 준다. 틀렸다. 과학의 진보에 따라오는 신의 후퇴라는 관념은 사실이 아니다.

실로 참인 것은 그 위대한 관념이 우리의 지성(이해력) 안에서 펼쳐지고 높아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의지의 직접적이고, 자발적이며, 초자연적인 행위를 본다고 믿었던 곳에서 자연적 원인을 발견할 때, 말하자면 그 의지라는게 없는 것이거나 아무래도 좋은 것인가?

물론 틀렸다.; 그 모든 것이 증명하는 것, 그것은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고 싶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증명하는 것, 그것은 이 현상이, 우리가 천지창조 속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이 현상이, 사물들로 정돈된 우주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가장 특수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신성한 사유 속 그 같은 영원성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이다.

뭐라고! 우리가 신의 힘에 대해 형성한 그 관념이, 단지 그 자연적 원인을 가질 뿐만 아니라 원인들의 무한의 순환에도 결부된다니! ;(의역, "신의 힘이 자연적 원인들의 연쇄에 개입한다고?")그래서 그것이 운동, 힘, 형상, 생명의 세부 사항이 아니며, 이 전체(조화)의 생성물도 아니고, 그 전체 밖에서 설명될 지도 모른단 말인가? (부연설명 : 그러니까 자연법칙에 자꾸만 개입하는 초월자인 신을 반드시 넣어야 세상 설명이 된다는 소리냐?)

그리고 지금, 그것이 보이는 바 대로, 왜 이런 논문이 우리가 연구하는 대상에서 생소한가?

그것은 사회경제의 현상 또한 그것의 유능한 원인 그리고 그것의 섭리에 따른 의도를 갖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의 질서들 속에서, 물리학, 해부학, 혹은 천문학처럼, 우리는 흔히 명확하게 목적인을 부정하는데, 왜냐하면 그 유능한 원인이 (여기서는) 절대적 필연성의 성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회세계는 조화 속에서 비옥하니, 그 조화는 지성이 그 설명을 찾기 위해 그 원인에로 거슬러 올라갈 때, 그리고 그 현상의 목적지를 알기 위해 결과에로 내려올 때, 비로소 완전히 지각(인식)할 수 있다.


오늘은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문 번역인은 아니고.
또 논문 쓸때는 의역보다는 원어 형식을 살려서 번역하는게
의외로 훨씬 편하다 보니
문장이 난잡을 넘어서 중2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하시기 바랍니다.

바스티아는 천문학이나 다른 과학처럼 경제학도 어떤 필연적이고 보편된 법칙에 지배받는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다만 그 법칙을 '독일 철학자들' 마냥 관념이나 정신에서 찾는다기 보다는.... 그냥 상식적으로 자기 세상에 살면서 주어지는 사실들, 그리고 그 사실들 속에 숨겨진 본성들, 그것들에 대한 직관을 기반으로 찾아내는 것이죠.

학문의 필연성이라면 무슨 물리학자냐 물리주의자냐 정신 드립 치면서.. 라고 하실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필연성은 수학을,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도서관 가셔서 유클리드 기하학 1편 삼각형 편을 딱 펼치면...
개념정의, 공리, 공준 가지고 추론을 빼도박도 못하게 하죠...

그러니까 여기서 필연성이란 학문 일반이 사실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앎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내는 법칙들 사이의 관계와 그 성질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모든 학문은 사실에서 법칙을 뽑아내고... 법칙으로 사실을 설명하려는 한,, 나름대로의 법칙성, 필연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프레데릭 바스티아 연재]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경제학 기초 개념 으로 넘어갑니다. 다들 기대해주시고... 행여 논쟁거리가 있다면 과감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마르크스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왠지 제가 반가우실지도 모르겠네요... 자본론에 바스티아 이름이 나오거든요. 물론 한 욕 사발을 들어먹는걸로 알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