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 메디치 가는 왜 미술에 후원했을까?

in #kr-newbie7 years ago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 메디치 가는 왜 미술에 후원했을까?


학교에서 사회나 역사 수업 중 르네상스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을 겁니다. 르네상스 미술은 주로 종교, 특히 성경 내용을 바탕으로 한 미술품이 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부유한 상인들의 예술 후원이 서로 경쟁하듯 이루어졌으며 대표적인 후원자 가문은 메디치 가문입니다.
코지모 디 메디치는 아버지로부터 피렌체의 가장 큰 은행을 물려받고 이를 전 유럽으로 확장하였으며 정치계로도 영향을 주어 가문의 위치를 경제계 이상으로 넓혔습니다. 그리스 로마 고전 연구, 성당 개축 경비 지원 등에 후원을 하며 후원자의 이미지를 구축해나갔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적인, 예술 발전을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인식되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터만큼 치열한 곳이 온갖 권력이 몰려있는 곳인 만큼 신흥 가문이던 메디치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한 모든 술수를 가리고 예술에 후원하여 돈을 건강하게 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종의 자선 사업인 셈이죠.
코지모의 아들 피에르 또한 가문의 이미지 조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메디치 궁의 <동방박사들의 행렬> 벽화에 그 의도가 드러납니다.
1439년의 피렌체 종교회의(메디치가의 주도권 확보에 큰 기여)에 비잔틴 황제, 희랍정교의 총주교, 서로마교황,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네 대표인 스포르자, 말라테스터, 곤자가 그리고 메디치가가 참석했습니다. 이것을 기념한 벽화입니다. 이 그림의 등장인물은 당시 실존 인물들로 대치되었으며 세 동방 박사 중 한 명은 메디치가의 어린 로렌초의 초상입니다. 피에로 디 메디치, 코지모 디 메디치도 등장합니다.

489C96D7-B9EC-4797-A31F-81C262AB5C58.png

이 그림을 그리던 도중 고촐리(동방박사의 행렬을 그린 화가)가 주문자인 피에로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오늘 아침(1459년 7월 10일) 로베르토 마르텔리를 통하여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를 보고 내가 그린 세라파노(천사)가 적당한 자리가 아니어서 당신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는 구름들 사이에 그렸는데 이것은 날개 끝만 보일 뿐 거의 안 보이는 정도입니다. 거의 가려져있기 때문이 그림을 전혀 왜곡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아름다움을 더 해 줍니다. 다른 하나는 제단 반대편에 그렸는데 이 또한 감추어져 있습니다. … 그렇지만 저는 당신이 명령한 대로 하겠습니다. 작은 구름 두 쪽이면 그것을 없앨 수 있습니다.

화가와 주문자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자유로운 표현으로 자신의 세계를 그려나간다는 화가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릅니다. 이 당시 그림 주문 계약서에는 어떤 사물에 무슨 색을 써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된 문서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피에로의 아들 로렌초(앞서 동방박사의 행렬에 얼굴 등장)는 주로 고전을 번역, 출간케 했고 장서를 모으며 그리스 로마 조각을 모아 조각가들에게 공개하며 참고하게 하였습니다. 어릴 적 인문학을 배웠고 유능한 학자를 주변에 뒀으며 이탈리아 문학사에 남는 유능한 시인이었으며 예술에 조예가 깊은 성향으로 비롯된 행위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많이 들어보셨을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궁에 들이기도 했습니다.
로렌초는 다른 지방의 왕이나 공작들에게 피렌체 화가를 소개하여 보내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루도비코 일 모로에게, 안토니오 다 싼 갈로를 나폴리에 보내는 등. 이와 함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외교정책으로 잘 활용했습니다.
이후 로렌초의 아들 조반니(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바티칸 궁의 벽화에서 자신의 정치 선전을 꾀했습니다. <보르고의 화재>, <오스티아의 전투>, <샤를르마뉴 대관식>등 레오 3세, 레오 4세의 업적을 기리는 사건에 자신의 초상을 넣게 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1494년 피렌체에서 추방된 후 1551년부터 다시 세력을 잡았습니다. 공작 코지모 1세가 1570년 토스카나 공국의 대공작이 되면서 메디치가는 다시금 힘을 얻습니다. 타피스트리, 조각상, 판화, 벽화, 초상화 등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공공연하게 선전하였고 팔라초 베키오의 벽화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온 벽면과 천정에 42장의 작은 벽화, 6장면의 거대한 벽화에 메디치 가문의 번영 역사를 그렸고 천정의 <공작 코지모 1세의 신격화>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 공작의 지위를 넘어 군주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5세기에 가문의 선전으로 이루어지던 예술의 후원이 16세기엔 이미지메이킹의 노골적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11EAD785-7822-43BF-A84A-6D57B9D50CD5.jpeg


저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예술 분야는 독자적으로 힘을 떨치던 순간이 없었다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습니다. 온갖 작품이 등장했던 르네상스 시기 일지라도 그 바탕엔 주문자의 강한 입김이 작용하였고 이는 예술 애호라기보다는 자선과 같은 개념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환상이 조금 깨졌습니다.
이전에 르네상스 미술은 메디치가가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부흥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최근 이에 관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미술을 공부할수록 다른 분야에 비해 사회적 입지가 초라하다는 생각이 점점 들더군요. 제 환상을 깨고 냉정하게 바라보고자 하였고 제 공부 방향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봅니다

Sort:  

스폰서와 미술가의 관계는 참 여러가지가 있죠.

연예인과 소속사 관계와 유사하다고 봅니다. 미술가 이야기 접할수록 이 생각이 강해지네요.

전 예술사를 공부할 때 불가침의 영역일 것 같은 종교화의 전통적 상징마저도 정치적 이유로 변형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르네상스 과도기에 시에나에서 활동했던 마르티니가 그린 수태고지에는 수태고지 그림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백합 대신 올리브 가지가 그려져있는데, 백합이 당시 시에나와 적대 관계인 피렌체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시에나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로 대체한 것이라고 합니다.

종교화 제작 자체도 어느정도 정치적 목적이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한 미술이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해되는 때가 종종 생기고 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메디치가문이 예술가를 많이 후원했다고만 알고있었는데
그 이면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군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참 먹고살기 힘들게 느껴지는군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