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이 모여서 동아시아 짬뽕을 말하다

in #kr-newbie7 years ago

‘짬뽕 증언대회’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극소수를 빼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짬뽕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짬뽕은 중국인이 만들고, 일본에서 꽃을 피웠으며,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이다. 짬뽕을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지’가 펼쳐져왔다고 할 만하다.

2월21일 서울 서교동 한 중식당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박찬일 요리사, 중식당 ‘진진’의 왕육성 요리사, 일본 나가사키 현 운젠 시의 짬뽕 전문가 하야시다 마사아키 씨,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가 참석해 짬뽕 대담을 나누었다. ‘동아시아 짬뽕을 말하다’라는 행사명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행사를 축약하는 말이었다. 그럴듯한 학술발표회도 아니었지만 관심은 뜨거웠다. 한·중·일 삼국이 ‘짬뽕을 말하는’ (아마도) 최초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를 기획한 건 박찬일 요리사다. 그는 과거 일본 나가사키에서 짬뽕을 맛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늘 먹던 빨간 짬뽕이 아니라 설렁탕처럼 허연 국물에 면을 넣은 것이었다. 대체 ‘짬뽕이 뭘까’라는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3년 전 일본에서 ‘짬뽕 반장’으로 통하는 운젠 시의 공무원을 만나게 된다. 그가 이번 행사에 참석한 하야시다 마사아키 씨다.

하야시다 씨는 거품 경제가 꺼진 이후 오바마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줄자 지역 명물인 짬뽕으로 지역을 살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매년 ‘짬뽕 월드 클래식’을 개최하는 등 지역 짬뽕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NHK 드라마 <우리 아빠는 짬뽕맨>의 모델이기도 했다. 하야시다 씨는 ‘짬뽕을 통한 다문화 공생 사회’를 지향한다.

왕육성 요리사는 맛집 좀 찾아다니는 이들 사이에 모르는 이가 없는 ‘스타 셰프’다. 그가 운영하는 서교동 진진은 합리적 가격에 괜찮은 중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으로 정평이 났다. 그는 경북 안동 출신의 화교 2세다. 식당 이름인 진진(津津)은, 아버지의 고향인 중국 톈진(天津)과 서교동 인근 양화진(楊花津)에서 글자를 따 만들었다. 한국에 사는 화교 2세의 정체성이 담긴 요리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지난해 가을 박찬일 요리사는 왕육성 요리사를 만나 ‘짬뽕 기획’을 제안했고, 흔쾌히 성사됐다.

이야기는 짬뽕의 기원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짬뽕의 고향은 일본 나가사키다. 1859년 자유무역항이 된 나가사키에는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온다. 이 중에는 중국 푸젠성 출신 천핑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17세기부터 ‘당인촌’이라는 중국인 거주지가 있던 나가사키에 1899년 ‘시카이로(四海樓)’라는 식당을 개업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자는 뜻을 담았다.

천핑순은 푸젠성 음식인 탕러우쓰멘과 초육사면을 응용해 짬뽕을 만들었다. 본디 고기와 간단한 채소 위주인 푸젠성 음식과 달리 나가사키의 풍부한 해산물과 갖은 채소를 곁들였다. 배고픈 중국인 유학생과 노동자를 위한 음식이었다. 이후 100년 넘게 이어져온 시카이로는 이제 한국인에게도 꽤 알려진 지역 명소다.

짬뽕의 일본어 발음은 ‘잔폰’이다. ‘밥 먹었냐(吃飯)’라는 중국어의 푸젠성 사투리 ‘차폰’에서 왔다는 설이 있고, ‘섞는다’는 뜻의 일본어 ‘잔폰(ちゃんぽん)’이 어원이라는 말도 있다. 각종 설이 분분하지만 일본말 ‘잔폰’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짬뽕’으로 변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흥미롭게도 일본어 잔폰과 한국어 짬뽕은 쓰임새도 똑같다. 일본에서도 짬뽕은 음식 이름 말고도 ‘(술이나 의약품을) 섞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어제 술을 짬뽕했더니 머리가 아프다” 같은 용례가 일본에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차폰, 잔폰, 짬뽕>을 펴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에서 쓰이는 ‘짠폰’이란 말 역시 뒤섞어놓은 상태를 뜻한다. 주 교수는 1930년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침략하면서 이 말이 널리 퍼진 게 아닌가 추측한다.

한국 짬뽕과 일본 짬뽕은 같지만 다른 음식이다. 왕육성 요리사에 따르면 본래 한국 짬뽕은 나가사키 짬뽕처럼 하얀 짬뽕이었다. 하지만 돼지고기로 기름을 낸 짬뽕을 느끼하게 여긴 한국인들이 처음에 실고추를 넣어 먹다가 고춧가루로 이어지면서 오늘날처럼 맵고 빨간 짬뽕이 탄생했다. 왕 요리사는 “1970년대에 처음 빨간 짬뽕을 접하고 ‘매운탕면’이라고 불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매운탕이나 찌개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매운 짬뽕을 선호하면서 과거 중식당의 인기 메뉴였던 우동과 울면이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면발 차이도 크다. 일본 나가사키로 이주한 중국인은 중국 남부, 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은 중국 북쪽 산둥성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 남부의 영향을 받은 일본 짬뽕 면은 끈기가 없이 툭툭 끊어지는 반면, 한국 짬뽕 면은 쫄깃하다. 일본 지역 일부 짬뽕식당에서는 쫄깃한 면발을 내는 곳도 있다.

한·일 짬뽕 경계는 사라지고 있어

‘맛있는 짬뽕’의 기준도 달랐다. 하야시다 씨는 “너무 진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중간 맛, 면발 역시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아야 맛있는 짬뽕”이라고 말한 반면 왕육성 요리사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없다. 취향에 따라 구수한 맛과 시원한 맛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짬뽕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선 글자 그대로 한·일 양국 요리의 ‘짬뽕’도 이루어졌다. 오바마 마을식 레시피로 만든 국물에 진진에서 만든 면을 한데 섞었다. 나가사키를 오랫동안 취재한 박정배 칼럼니스트는 “오바마 마을에서 먹었던 짬뽕보다 오늘 짬뽕이 더 맛있다. 한국의 면과 일본의 국물이 만나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라고 말했다.

희고 빨간 한·일 양국 짬뽕의 경계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최근 한국에선 ‘하얀 짬뽕’을 내는 중식당이 늘고 있고, 인스턴트 면으로 만들어진 한국식 매운 짬뽕은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하야시다 씨는 “한국에서 맛본 빨간 짬뽕이 아주 맛있었다”라고 말했고, 왕 요리사는 “다음번엔 우리가 일본으로 가서 이런 행사를 열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따로 떨어져 있던 동아시아의 짬뽕이 비로소 한데 뒤섞이는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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