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배제한 논리
오래전 노스모크에서 인간을배제한논리라는 페이지를 보고,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인물의 쿨함을 떠올린 적이 있다. 토론이 산으로 흐르는 경우는 토론자가 지나치게 감정에 휩싸여 토론의 내용보다 토론 상대자를 비난하고 인신공격할 때 보통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배제한 논리적 토론,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걸 해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니다.
과학철학을 공부할 때, 사실과 가치의 분리 혹은 과학에서의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이라는 걸 배운다. 과학철학은 발견의 맥락을 건드리면 안되고, 반드시 과학 내부의 이론과 데이터가 상호작용하는 정당화의 맥락만을 다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합의였다. 토마스 쿤은 역사주의적 과학철학으로 그 경계를 깬 인물이다. 그는 발견의 맥락을 과학사가 다루는 영역에서 과학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토론에서 감정과 이성이라는 이상한 이분법도 마찬가지다.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편의에 따라 나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토론이 건강하게 흐르게 하기 위한 원칙들은 존재한다. 여러 원칙이 존재하겠지만, 가장 잘 작동하는 건 말과 글의 과녁이 사람을 향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조직과 권력을 겨누는 말과 글은 토론을 생산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조직과 권력 또한 사람으로 구성되는 바, 그 조직과 권력에 닿은 사람의 감정이 토론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최선의 방식은 웃으며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다. 특히 아나키스트에게, 권위주의와 위계질서, 권력이 불합리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냄새는 분노를 이끌기 마련이다. 하지만 첫번째 원칙, 즉 토론에서 사람이 아닌 조직과 권력을 겨눈다라는 원칙만 지킨다면, 그 비판에서 감정이 다치는 개인들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된다.
한국은 직설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나라다. 대부분의 말들은 돌려말해진다. 많은 발화들이 그냥 하는 말인 경우가 많고, 어떤 말을 믿어야 하는지는 그 사람과의 관계나 맥락이 결정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토론에서도 그런 문화가 반영된다. 직설적인 토론이 어색해 보이는 이유는, 한국의 문화가 그런 직설적인 토론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문화에서 이단아였다. 여전히 그렇다. 물론 나도 한국도 틀리지 않았다. 서로 많이 다를 뿐이다.
어떤 조직이 적폐의 산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조직에서 조직을 바꾸기 위해 싸워온 어떤 인물이 있다. 그와 함께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조직을 비판하고 완전히 바꾸어 놓고 싶다. 그 조직에 속한 인물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느낀다. 묻는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현명한 대응을 할 것인가.
이 부분 너무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반성도 많이 하게되네요 @홍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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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모크 정말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아직 유지가 되고있군요.
이런 경우에 맞닥뜨리면.
나는 당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과 공동목표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감성적으로 파고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