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적극적 자유를 맞이할 용기 있는 자, 누구인가?
적극적 자유를 맞이할 용기 있는 자, 누구인가?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영국의 청교도 혁명, 미국의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 등으로 대표되는 시민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이념적 토대로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일어난 서양의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도 외부의 억압에 저항하여 자유를 찾으려는 시민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자유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이 온갖 형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갈망해온 대상이며, 궁극의 추구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외부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외부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고, 현재까지 인간이 얻은 자유는 외부의 억압과 규제가 사라진 ‘소극적 자유’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이 ‘소극적 자유’는 근대인을 독립적, 자립적 존재로 이끌었지만, 그렇게 갈망했던 자유를 다시 버리는 모순적 행태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주체적인 의지나 내면의 힘이 결여된 ‘소극적 자유’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불안, 공허함, 무력감이 뒤따르기 때문에 근대인은 안정감과 소속감을 줄 대상에 귀속되고자 한다는 것이 프롬의 해석이다.
이에 프롬은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기 위해 ‘적극적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적극적 자유’란 “자아실현과 같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인데, 이 ‘적극적 자유’를 누리기 위한 방법으로 프롬은 ‘자발적 활동’을 제안한다. ‘자발적 활동’은 단순히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며, 나아가 자신의 의지 속에서 할 수 있는 ‘창조적 활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프롬이 제시한 ‘적극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 ‘소극적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자유일지라도 그러한 자유가 충족된 위에서 ‘자발적 활동’, ‘창조적 활동’과 같은 ‘적극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프롬이 말하는 ‘소극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가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기 위해 ‘소극적 자유’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들 개개인은 외부 세계에서 발생하는 권력, 소문, 사회적 관계들에 따라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선택, 자유의지보다 외부의 요인들에 더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우리가 ‘소극적 자유’조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외부의 시선이나 권력에 순응하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체제에의 순응은 사회 통합, 결속력, 질서 유지와 같은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력에, 권위에, 자본에 순응하는 개인들의 얼굴에서 자유가 주는 평온함보다 불안과 두려움의 모습이 발견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외부의 요인이 그 기준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우리 사회는 다음 세대를 이끌 대학생들에게 자격증, 공인영어시험, 학점, 인턴 등과 같은 많은 스펙을 요구한다. 스펙을 준비하지 않은 대학생들에게는 나태하고 준비되지 않았다며 비난하고, 학점과 스펙을 쌓는 일에 몰두하는 대학생들에게는 도전 정신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것은 진실일까. 그렇지 않다. 이면에는 이러한 사회 현실을 야기한 대기업과 정치권의 유착과 같은 기득권 세력의 횡포가 있다. 이들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사회 구조에 대학생이 맞출 것을 요구하며, 기득권의 세력 유지를 위해 대세를 따를 것을 조장한다. 이런 거짓된 체제에 의문이 들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에 편승한 이들은 과연 진실 앞에서 자유로운가. 결국 진실을 마주할 용기 없는 자의 선택이 ‘히틀러’와 같은 권력자의 체제를 용인하고, 힘들게 찾은 ‘소극적 자유’마저 잃게 만든다.
우리 사회에서 프롬이 말하는 근대인의 속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는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입시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기존의 억압이 주던 안정감, 소속감에서 벗어나면서 불안, 고독을 느낀다. 때문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억압할 또다른 대상을 찾으려 스펙 쌓기에 몰두 한다.
하지만 다음 사회를 이끌 이들 대학생이 권력의 핵심에 섰을 때 불의에 저항하며 권력에 항복하지 않는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적극적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내면의 힘, 용기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몇해 전 2014년 5월 중앙대학교 철학과 김창인 학생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생각난다. 이 학생은 2008년 5월 두산그룹이 중앙대학교를 인수한 이후 대학 기업화와 학과 구조조정 사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학교 측은 그의 문제제기에 대해 징계 처분으로 답했다. 김창인 학생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교육을 버리고 이윤을 추구한 학교에 대한 저항만은 아니다. 추구해야 할 진실을 억압하는 허위에 대한 저항이며, 진정한 자유, ‘적극적 자유’를 마주한 용기이다.
우리의 삶은 늘 허위와 진실의 경계에 서 있다. 이 경계에서 ‘소극적 자유’만을 추구할 것인가, ‘적극적 자유’도 함께 추구할 것인가? 그 선택의 몫은 개인에게 있다. 그럼에도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 있는 개인이 모일 때 우리 사회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임을 분명해 보인다.
반갑습니다. 이 글은 '진실과 허위의 경계'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쓴 글입니다.
이 경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여전히 물음은 많이 남지만 제 나름의 답은 '용기'에 있었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나 또다른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에는 oooooing님 말씀대로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용기를 낸 사람들의 행동이 한순간의 의견분출로 끝나는 것이 아닌,그 행동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행복하게 되는 사례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보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도 용기를 낼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라는 막연한 (어떻게보면 순진한) 생각을 하게되네요. 책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D
네. 적극적 자유 즉 자발적 활동을 저해하는 요소를 관성이라 표현할 수 있겠네요! 용기내는 사람이 보다 더 많아지길 바라는 magical-salt님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저부터 용기를 내야겠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
사회의 틀을 깨고 싶어해도 사회에서 "아웃사이더" 가 되면 이 사회가 아웃사이더에 관대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 순응하게 되고 나이가 들고 ..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아웃사이더”가 되길 자처한 용기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회 대신 우리가 먼저 관대해진다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순응이 나쁘다할 순 없지만 무조건적인 편승이 되진 않아야겠지요. 흘러가지 않아야 하는 것들은 붙잡는 용기를 내봐요 우리!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