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차 속에 숨어있는 까마귀.
부지당 차(茶) 이야기 17
모리거사의 차 이야기를 읽고 계시는 분들은 3개월전 ‘부지당의 차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글이 ‘일차일로(一茶一路)’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말을 지구촌을 육로와 해로를 연걸하는 새로운 실코로드를 열겠다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한 시진핑의 큰소리에 고추가루라도 뿌려 보려겠다는 모리거사 다운 객기 정도로 여겼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할 우리 차(茶) 이야기는 어째서 본인이 그같은 큰소리를 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이야기는 북방대륙을 휘젓고 중원(中原)까지 말발굽으로 누볐던 기마민족의 흔적을 차(茶)속에서 찾아 낼 것이고, 또한 지구촌의 평화와 생명을 구할 실천 철학으로써 그 가치를 발견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대한 북방 대륙의 주인공으로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외세의 힘으로 고향에서 쫒겨나 반도(半島)로 밀려나왔고, 급기야는 허리까지 잘려져 슬픈 현재를 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차례(茶禮)문화의 상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면 앞서 나는 우리들에게 차(茶)라는 낱말을 나뭇잎으로 만든 기존 차(茶)라는 식물(食物)로 보지말고 어떤 특정한 ‘문화’의 개념으로 바라 보아야 본질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다시말해 차례(茶禮)속의 차(茶)란 글자의 뜻을 ‘제사지낼 차(茶)’란 문화적 형식(形式)으로 보아야 하고, 기존 인식처럼 ‘차(茶)’로 제사지내는 예법으로 해석한다면, 차(茶)란 글자의 본래의 뜻을 찾아 다시 방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차(茶)자를 제사 의식(儀式)을 상징하는 문자로 해석하면 상(床)에 어떤 것을 올릴 것이냐는 별로 중요해지지 않게 됩니다. 어떤 제물(祭物)도 상에 올려질 수 있고,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많은 식물들이 뒤에 차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도 알 수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차에 대한 이같은 인식(認識)은 완전히 새로운 페러다임으로 차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이리되면 제사(祭祀)의 형식이 왜 차례(茶禮)라 일컫게 되었는지가 문제가 될 뿐입니다. 이제부터 이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 한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먼저 인간들이 왜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사는 인간이 가진 공포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독자적인 생존이 어려웠기 때문에 모여 살아야 했고, 그래서 사회적 동물로 규정되었습니다.
결국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게 인간이란 이야기이고, 처음에는 그 대상이 부모였지만 성인이 되면 다른 힘을 찾아 방황해야 하는 허약한 존재가 인간의 모습이란 이야기입니다.
제사(祭祀)는 바로 이같은 인간의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형식(形式)이었다고 볼 수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제사장은 이같은 인간심리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같은 제사 의식(儀式)이 도덕(道德)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동물은 절대 어미나 애비에게 먹이를 양보하지 않는 반면, 인간만은 윗사람을 챙기는 이른바 효심(孝心)을 가진 우월한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효심을 앞세워 제사의 형식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제사(祭祀)는 귀신(鬼神)이 되었을지라도 어른을 챙기는 도덕적 행위로 간주되었고,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필수적 행위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유교(儒敎)가 효(孝)의 가치를 구현하는 중요한 실천으로 제사를 거론했던 이유도 여기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는 바로 인류 문명을 발전시키는 큰 역할을 담당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지구촌 모든 종족들이 제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이것이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제사문화는 어떠했을까요?
이상하게도 우리는 다른 민족 국가에서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제사 형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름부터 ‘차례(茶禮)’라는 특이한 대명사가 붙어있으니까요. 차(茶)라는 글자를 자신들이 제일 먼저 쓰기 시작했다고 악을 쓰는 중국조차 자신들의 제사에 차례라는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차례는 천제(天祭)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은 땅을 숭배해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농경문화를 일구며 지령신(地靈神)을 모시고 사람이 죽으면 평지(平地)에 묻어 버리거나 화장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음귀(陰鬼)로 보고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명당(明堂)을 찾아 산으로 가서 시신을 묻고 차례를 지내줍니다. 이처럼 시신(屍身)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민족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사의 내용과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제를 우리는 왜 차례라 불렀을까요? 고대 조선의 단군(檀君)이 차례를 지냈던 곳 중 하나인 마니산으로 가보기로 합시다.
강화도 마니산에 위치한 참성단(塹星壇)은 사진에서처럼 제단이 꾸며져 있습니다. 나무가 근처에 서있고, 그 아래쪽 밑에는 우물터가 있습니다. 높은 산과 나무, 그리고 물이 나오는 우물, 이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제사장이 차례(茶禮)를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제단에서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사의 형식에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같은 미스테리는 풀어보기 위해 시간여행을 한번 떠나 봅시다.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당시의 장면도 떠올려 봅시다.
단군이 제(祭)를 지내려면 먼저 제물(祭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바치는 제물로서 적당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시다.
당시 어떤 것을 주된 제물로 삼았을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본인은 그중 가장 합리적인 것은 ‘정화수(井華水)’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제단 밑이나 근처에 옛 우물터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물이란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귀중한 선물일 것입니다. 물이 없었다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니까요. 하늘의 자손(天孫)으로 생각했던 우리가 예부터 물을 하늘로 보았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새벽에 일어나 장독대에 정한수를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던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같은 풍습도 그 기원(起源)을 천제에 두고 있다고 봅니다.
제사장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정한수’를 길러와 이를 제물의 핵심으로 삼았다고 추정하지만, 거기에 그냥 물만 올렸을까요? 고대인들이 물을 곧 하늘이 준 선물로 인식했다면,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어떤 것을 첨가했을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단수(神壇樹)잎이 될 것이라 추정합니다.
신단수란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우주(宇宙)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제단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을 것이고, 또한 하늘과 가장 가까이 서있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이 나무 잎을 따서 정화수에 띄워 제를 지냈을 것입니다. 물론 정화수 이외에 다른 음식들도 올려질 수있겠지만, 정화수와 신단수 잎이 제물의 중심일 것입니다.
이처럼 제를 올릴 준비가 완료되었다면 제사장은 어떻게 예식을 진행하게 될까요? 또 어째서 여기에차례란 이름이 붙여졌을까요? 이 이야기는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