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피터슨과 손을 맞대보는 저녁
정말 행복할 때는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고, 왼쪽 눈을 크게 찡그리며 웃게 된다. 그렇게까지 크게 웃는 건 대개 이어폰 사이로 나오는, 무척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인데, 간만에 그런 표정을 짓게 되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클래식 라디오만 들었던 적이 있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것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재즈가 그리웠던 것 같다. 오랜만에 재즈 라디오를 틀었고, 오스카 피터슨이 나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듣던 오스카 피터슨의 Corcovado는 내게 찡그린 웃음을, 틈 없는 행복을 선물해주었다.
그 뒤로 Corcovado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카피할 생각이었는데, 유명한 앨범의 수록곡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쉽게 악보를 구할 수 있었다.
< Oscar Peterson Trio - Corcovado >
오스카 피터슨을 연습하다 보면 아는 피아니스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오스카 피터슨은 손이 무척 커 11도(도에서 파, 심지어는 파에서 시b까지도)까지 닿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기는 오스카 피터슨의 곡을 연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내게 그 얘기를 한 사람은 도에서 미(10도)까지 손이 닿았다.
나는 손을 쫙 찢으면 도에서 레(9도)까지 닿는다. 같은 9도지만 도#에서 레#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흰 건반에 손을 걸쳐야만 겨우 9도를 같이 누를 수 있고, 연주로 보면 도에서 도, 딱 한 옥타브만 가능한 슬픈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
오스카 피터슨을 연습하지 않는다는 지인의 이야기는 솔로(Solo)보다는 보이싱(Voicing)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쉽게 설명하자면 코드를 연주하는 방법이 보이싱이다). 오스카 피터슨보다 손이 작은 사람은 애당초 원곡 연주가 불가능하니, 연주를 하려면 보이싱을 각자의 손에 맞게 바꿔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임의로 음을 덜거나 더하게 되는데, 그것을 오스카 피터슨 보이싱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지인은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Corcovado는 트리오 연주기 때문에 보이싱이 크게 문제 되진 않는다. 역시나 왼손 컴핑(Comping)을 한 손에 잡을 수 없어 덜어내야 하지만, 연주의 방점이 오른손에 있어서 단선율인 솔로 라인만 잘 연주해도 어찌저찌 넘어갈 수는 있다. 그렇지만 작은 손으로 열심히 연주하다가도, 한 번씩 손을 크게 벌려야 할 때는 어떤 손가락 번호로 연주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손가락 번호로는 해결하기 힘든 손 크기의 차이지만, 어쨌건 머리를 쥐어짜내 군소리 없이 해결해야 한다.
빌 에반스를 연주할 때도 늘 작은 손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악보를 보면 빌 에반스 역시 도에서 미(10도) 정도는 거뜬히 닿았던 것 같다. 빌 에반스를 연주하는 중에, 손이 작아 음들을 고쳐야 할 때는 왠지 모를 부끄럼이 든다. 좋아하는 오빠 앞에서 손을 내밀어야 할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내 뭉툭하고 짧은 손가락과 미운 손톱 모양이 부끄러워지면서 괜히 악보를 덮고 싶어진다.
이상하게도 오스카 피터슨의 악보 앞에서는 그런 부끄러움이 사라진다. 내 손이 작다며 신기해하는 오스카 피터슨과 거리낌 없이 손바닥을 맞춰보는 기분이 든다. 손이 작아 피아노 치기 힘들다고 투덜대는 나의 머리를, 동네 오빠처럼 푸근한, 그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어주는 상상을 해본다.
건반 위로 손을 활짝 벌려, 오스카 피터슨과 손을 맞대보는 토요일 저녁.
HAVE a nice weekend ^^;
전 도에서 도까지 밖에 안 된답니다. 악보의 저 노래...떠오르는 영상이 있군요.
그러고보면 음악에도 유리한 신체조건이 있네요...
ㅎㅎ 제 왼손은 활짝 펼치면 도-미고, 그냥 한번에 치는건 도#-레#까지입니다. 어릴 때 맨날 왼손 손가락 사이 사이 벌리기 하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효과가 있긴 한지 피아노 제대로 안 친지 2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왼쪽 엄지-검지가 오른손에 비해 훨씬 넓은 각도로 벌어져요. 그나저나 도-파라니.. ㅎㄷㄷ
오늘은 글이 좀 귀여운 느낌이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