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영화] 벌새 (House of Hummingbird)

in #kr5 years ago (edited)

누군가에게는 뻔한 얘기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얘기


 <벌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봤다.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극찬했다. 그러다보니 꼭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일부러 아무런 사전 정보도 접하지 않았다. 그래야 영화를 더욱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을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벌새>는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은 맛없는 음식과 같은 영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기대하는 킬링타임 무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 어떤 자극적인 콘텐츠도 나오지 않는다.


 나중에 찾아보니 김보라 감독이 故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무언가를 작위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덤덤하게 그려내는 것이 그 분 작품의 특징이다.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의 삶 또한 그렇게 있는 그대로 그려진다. 


 이 영화의 배경인 1994년은 나 역시 중학생이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극중 은희보다 1살 나이가 많다.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 선배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물론 극중 은희가 다니는 학교는 여학교라 그럴 일은 없었을 것 같지만)

 이 영화의 디테일은 매우 놀라울 정도이다. 은희와 친구들 사용하는 소품 하나. 지나가는 배경의 글귀 하나하나까지 그 시절을 완벽히 재현해냈다.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덕분에 나는 잊었던 부분들까지 내 중학시절을 대부분 소환할 수 있었다. 

 그러하다보니, 이 영화는 내게 있어 뻔한. 지루한 얘기들의 반복이었다. 마치 지금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나를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 거기에 무슨 새로운 내용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영화의 러닝타임도 길어서 후반부로 넘어가면서는 "언제 끝날까", "감독은 도대체 어떻게 영화를 끝낼 생각인 거지?"라는 생각만 계속 했다. 영화의 스토리 전개 상 어느 지점에서 끊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리의 삶이라는게 죽음이라는 사건을 제외하면 끝이란 없으니까. 자신을 향한 카메라가 멈추는 순간이 영화의 끝일 것이고 그 시기는 그냥 감독이 마음 먹기 나름이었다.



"불편했어"


 영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던 지점은 같이 본 사람의 말이었다. 불편하다고? 어디가? 그제서야 내가 봤던 장면들. 나에게는 매우 익숙했던 과거의 사건들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불편했다. 지금의 기준에서 본다면 말이다. 선생님들의 반말, 일상화된 가정의 폭력. 그 시절에는 흔했던. 나도 겪고, 내 친구들도 겪고. 내 주변에서는 익숙한 그 모든 일들이 지금의 기준에서 보니 심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랬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었고, 가해자들도 악인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받은 폭력과 마음의 상처를 가까운 사람들, 만나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감독은 그 모든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렇게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내온 야만의 시간을 보여준다. 그 어떤 인위적인 장치도, 서사도 필요없다. 과거 있는 그대로의 삶. 그 자체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충분한 메시지와 완벽한 서사를 전해준다.



과연 우리는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나아졌는가?


 이 질문에 각자가 현재 처한 상황이나 위치에 따라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나서게 하려는 것 같다. 무언가 불편하다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더 이상은 일상화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이후에 태어난, 21세기에 태어나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영화 속 주변 인물들이 은희에게 심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좀 문제가 있는 가정. 문제가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만큼은 우리 사회가 나아진 것이다. 그러한 것들에 문제의식을 느낄만큼,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다'라는 사회적 합의를 우리가 이뤄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1994년에 은희는 평범한 여중생이었다. 그 시절에 은희가 자신을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말했다면 어른들은 그맘때의 늘 가질법한 자기연민이라고 얘기했을 것이다. 나도, 내 친구들도, 내가 다니는 학교의 많은 아이들이 은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생각이 이쯤되자, 갑자기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생각났다. 영화 <벌새>에 비하면 응답하라는 얼마나 미화된 것인가? 그런데 그것이 미화되었다는 생각을 그 전에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늘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지"


 베프의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어느새 안좋은 기억, 불편한 일들은 머릿 속에서 지운 채, 지난 시절을 얘기할때, 꿈과 낭만. 로맨스 같은 아름다운 것들만 얘기하고 있었다. 정말 그랬나? 물론 그런한 것들도 존재했다. 어느시절에나 남녀가 있으면 로맨스는 피어나고,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멋진 우정을 만들어가며, 그 중 일부는 좌절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려가곤 하니까.


 그러나 보통의 삶은 그러하지 않다.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이라 부르는 것은 지루하고 괴로운 것들의 반복이다. 그리고 1994년. 그 시절의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의 일상 역시 <응답하라 시리즈> 보다는 영화 <벌새>에 더 가까웠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비현실적인 것은 영지 선생님이다. 운동권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영지라는 캐릭터는 마치 21세기의 인물을 20세기에 갖다놓은 것처럼 영화 속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감독이 만들어놓은 유일한 영화적 장치로 보여진다. 


 늘 오빠에게 맞고 사는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일러주며, 누군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면 그에 맞서라고 말한다. 지금 들어보면 당연하고 맞는 얘기지만. 그 시절의 나 역시, 만약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런 얘기를 했다면 매우 신선했을 것이다.



 영화를 다보고나서, 다른 분들의 후기와 해석을 찾아보았다.

 영화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든 모두 자유이기는 하지만.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는 영화에서 일부는 좀 해석이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성 관객분들이 올리는 후기나 감상에 대해서는 그 어떤 내용도 내가 뭐라 말할 자격이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동시대를 나와 같은 나이에 살았던 이들이라면.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일상이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가정에서 남자 아이였고 학교에서도 남자 아이였다.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은희와 같은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 내가 다른 그 시절을 보냈을 수많은 은희에게 감히 뭐라 할 수 있을까. 단지 내가 안도할 수 있는 건, 그 야만의 시대에서 우리가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는 것. 하지만 사회의 평균 수준은 나아졌더라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환경에 있는 가정이나 지역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곳에서 살고 계신 분들에게는 이 영화가 따뜻한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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