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주의] 백정각시놀음의 진실

in #kr7 years ago (edited)

소설 '토지' 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단오놀이를 하는데 구경꾼 속에서 백정이 딸 하나를 잡아낸 기라요. 한사 결단 달아날라는 거를, 아 그러씨 장정 몇이 덤비는 데야, 치마가 찢기 달아나고 속곳이 벗겨지고,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고놈의 가시나 몸매도 좋고 얼굴도 이삐게 잘 생깄더마.'

"볼 만 했겄네."

"그 이삔 가시나를 엎어뜨리놓고 장정들이 번갈아서 올라타고 이랴! 이놈의 소가 와 안가노! 함시로 엉덩이를 철벅철벅 때리는 기라요. 뿐이겄소?목에다 새끼줄을 걸고 네 발로 기게 하고 구경꾼 앞을 돌아댕기는데, 그 에미가 소개기를 가져와서 겨우 풀리났지마는 좀 안된 생각도 들고,"

"안되기는 머가 안됐단 말이오? 백정은 사람이 아닌께, 그 놈들을 오냐오냐 하고 내버려두었다가는 칼 들고 소만 잡겄소? 사람도 잡을라 들 긴데 옴작달삭 못하게 콱 기를 지이놔야지."

(박경리, 토지, 1993)

오늘은 이 짧막한 소설에서 시작된 기막힌 이야기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혹시 2013년 인터넷을 달궜던 백정각시놀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요?

이 만화가 기억난다면, 네, 그 얘기 맞습니다.

이 드라마 장면으로도 유명하죠

백정각시놀음, 백정각시놀이, 백정각시타기,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 다양하게 불리고는 있으나,

공통적인 모습으로 '백정 아낙네' 위에 올라타 희롱하는 모습이 조선의 오래된 풍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거, 진짜일까요?

세줄요약을 앞에 넣어주자면,

  1. 이런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2. 소설에서 에세이로, 에세이에서 드라마를 거치며 와전된 것.

  3. 희롱이 있었어도 조선의 풍습은 아님.

먼저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텍스트를 뒤져보겠습니다. 그러면

"백정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은 일제시대까지 지속되었다. 1911년 일제가 한국인의 체격과 체질을 조사하는 데 일반인들이 거부하자 백정 남녀를 강제로 동원했다. 일제시대 신문 기사 중 학교 운동회에서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색다른 경주를 실시하면서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단 백정 각시를 찾아내어 소처럼 엎드려 기게 하여 치욕을 겪은 백정 여성이 자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백정 호적에는 도한이라고 쓰거나 붉은 점을 찍어 일반인과 구분하였다.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졸업한 장지필은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호적 등본에 '도한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고는 형평 운동에 뛰어들었다. 백정 자제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들도 발생하였다"

라는 텍스트가 토씨 하나 안 빠트리고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텍스트의 레퍼런스는

" 국가보훈처 사적관리센터 http://sajeok.i815.or.kr/i815/m7/page//?qs1=&qs2=&qs3=���평사&mobile=yes&id=50 읽기자료 3번의 4" 라고 합니다.

읽기자료니 뭐니 할때부터 참 혓바닥이 길다는 인상을 받는데요,
모바일로 딴 조악한 주소는 때려치우고, PC 로 뒤진 이 주소를 보면

http://sajeok.i815.or.kr/i815/view_edu?idx=50

이 주소로 가봐도 레퍼런스가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 무슨 국가보훈처 사적관리센터라 해서 정부의 공인된 텍스트인양 써 놨는데, 국가보훈처 조직도를 보면

그런거 없네요

결론은 믿을 수 없는 사이트의 레퍼런스도 없는 텍스트..

이 텍스트는 어떻게 나온 걸까요? 텍스트에 나오는 '어느 일제 시대 기사' 라는 게 나름의 레퍼런스인데, 당연하게도

어느 신문인지, 언제 나온 기사인지도 모르는 기사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도 시기별로 정렬하면서 '백정각시놀이' 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글을 진짜 되는데까지 다 봤는데,

1993년 박경리의 토지 이후 백정각시놀이라는 텍스트가 처음 나오는 글은 1999년

[이규태 역사에세이] "백정여인 희롱하기" 시합도 라는 글이었습니다.

http://m.chosun.com/svc/article.test.html?sname=news&contid=1999100770387

한 동안 학교 운동회에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색다른 경주가 있었다. 학부모 놀이인데 스타트를 하면 관중 속에서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단 백정각시를 찾아내어 소처럼 엎드려 기게 하고 그 위에 타고서 달려 장대를 빨리 도는 경주다. 학교 운동회철이 되면 어느 고을에선가 말 없이 목매어 죽는 백정각시가 생겨나게 마련이었다던데 그 이유가 알 만 해진다.

이규태가 어떤 인간인지는 차처하고, 일단, 이 글은 1999년도에 써진 글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는 당연히 1도 없고, 에세이인 만큼 레퍼런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즉 이 글을 사실로 믿을 근거가 없습니다.

포인트가 이 부분[어느 고을에선가 말 없이 목매어 죽는 백정각시가 생겨나게 마련이었다던데 그 이유가 알 만 해진다] 인데,

수절하면 열녀비 세우고 관읍의 급을하나 올리고 추행이 일어나면 관읍의 급을 하나 내리던 나라에서 추행으로 여자가 목을 메었는데 뭔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도 안해봤나 봅니다

이 글이 더 개소리인 것은 당시 운동회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초등학교 운동회 이런 게 아니었기 때문인데,

많은 사람이 기억하다시피 군사적 훈련 목적이 있던 것은 둘째치고라도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기록원 위영 연구관의 글을 참조하자면,

… 시간이 당도하야 운동 예식을 행하는데, 총독 학부대신 민병석, 부총독 학부협판 민영 찬, 사무장 김각현, 할치신 마태을 미류고포 장도 호문위 해래백사, 접원 리필균 조재영, 사무원 헌보운 리한응 리릉화 한구호 리온 고희성 박영호 윤태헌 김면수 곽광희 방대영 윤 태길 김욱동 리종엽 신영익 김남식, 지휘 심판원 단아덕 보을덕 오귀죠 산도 오태울 미류 위필득 제씨가 각기 집무하더라. … 【 「독립신문」 1899. 5. 1, 논설】

거월(去月) 22일 경에 박천 선천 귀성 등 칠군에 설립한 101학교의 학도 2,400여 명과 교사 600여명이 정주군에 모여서 춘기대운동회를 거행하였는데 그곳 경찰서에서 그 성황을 조사하여 내부에 보고하였 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8.11. 1, 잡보)】

http://www.archives.go.kr/next/common/archivedata/render.do?filePath=2F757046696c652F70616c67616e2F313431333333393130343234352e706466

그니까 이규태의 에세이를 믿는다면,

유교국가 조선시대를 살았던 어른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있는데, 각종 부의 대신들과 3천명 + 학부모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낙네 위에 올라타 희롱을 한 놈이 있었다는 거네요
그것도 거의 매년?

... 미친듯

더 골때리는 것은 이 에세이가 방송언론계에 미친 영향인데,

조선일보에 실렸던 이 에세이를 읽고 감명깊었던 어느 방송작가가 줄거리를 써냈다고 합니다.

위에 방송화면으로도 나왔던 그 드라마, [백정의 딸] 인데요..

이 드라마는 천민의 딸로 태어나 굴곡 많은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일생을 차분한 어조로 풀어간 작품이라고는 하는데,

이 시대 지상파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조선시대에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땅땅땅 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 박정란은 “신문에 실린 백정에 관한 짧은 글을 본 게 드라마 집필로 이어졌다”면서 “아이디어를 얻기는 했지만 인물의 캐릭터와 스토리는 드라마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Enter/more23/3/all/20000204/7505946/1#csidxc8283adfc13a8a9a612a0775f61725b

백정의 딸 (2000) 이규태 에세이 "백정여인 희롱하기" 시합도 (1999)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시간 정황상 박정란 작가가 참고한 신문 글은 이규태의 이 에세이가 확실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백정각시놀이' 는 자기 자신을 레퍼런스로 끝없이 발전해서

지금도 백정각시놀이라는 글을 찾아보면 아 이거 드라마에서 봤어 이거 진짜야! 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속터진다.

이 기막힌 이야기는 교과서로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해서,

위 그림에 보면 이상각 <조선팔천> 이라는 글을 레퍼런스로 백정각시놀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여기서 잠깐, 조선팔천이라는 글은 언제 나온 책일까요? 1911년? 못해도 1920년쯤 되지 않을까요?

2011년 책입니다.

책 제목이 방심하고 읽으면 조선시대에 발행된 책처럼 느껴지는데, 개인적으로는 고도의 낚시라는 생각이 드네요 ㅋ

이 책에서는 예천, 7월 13일, 노동중앙회라는 비교적 상세한 시기를 밝히며 백정각시놀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하층민과 머슴들의 조합인 농청이 백정들을 탄압했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예천이라는 지명, 농청이라는 주체.

반형평사.

형평사와 반형평사까지 끌어들이면 글이 좀 길어지기도 하고 저작권 문제도 있어서 링크로 대체하겠는데,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8034

요약하자면 백정들이 '우리도 사람이다! 사람 차별하지 마라!' 하고 인권운동을 시작한게 형평사 운동이고

이걸 농청과 소작민 등이 짓밟고 남녀 가릴것 없이 때리고 부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 반형평사, 1925년 예천사건입니다.

백정각시놀이가 아예 근거없는 사건이 아니라고 하면, 구한말 백정을 탄압한 대표적 사건인 예천사건이 시대적 배경으로 걸맞습니다.

이 장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찾아본 사료가 부족하지만, 백정 아낙네를 성추행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

여하튼,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유발한 것이 김석희라는 인간인데,

누군가 하면 예천청년회, 소작인상조회 따위의 집단에 소속되어 활발히 행동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천청년회는 어떤 집단인가 하니,

"예천청년회의 규정에 의하면 회장은 일정액의 세금을 낸 자라야 하고 면장·경찰서장·판사·국민학교 교장과 같은 일제 부역인사들을 고문으로 선임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천청년회는 사실상 부유한 일제 부역자들의 친목단체였던 것이다(『조선일보』 1925년 8월 30일 「醴泉靑年會員 諸君에게」)

응 친일파

물론 기승전 친일파잘못이란 말은 아니고, 그냥 파보니까 친일파가 일제강점기에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데,

결국 전말이 어떻게 되냐? 여기까지 글을 써놓고 무책임한 말이기는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려장 냄새가 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진실을 검증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방송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개인적으로 이 웹툰의 꽃은

있지도 않았던 풍습을 사실인 양 포장해낸 작가의 능력과 이걸 제대로 조사도 안해보고 승인한 방송사의 병1신짓

뿐만 아니라 기승전 외국인 노동자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이라 생각합니다.

추천해주고 가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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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다시 파이팅해요!
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