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222] 명예로운 종전

in #kr7 years ago

감동적인 전쟁은 없지만, 그 끝이 감동적일 수는 있다. 17세기 에스파냐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브레다의 항복'은 미술사와 전쟁사 모두에서 유례가 없던 명장면을 보여준다.

1625년 6월 5일, 에스파냐의 장군 스피놀라가 철통 같던 네덜란드의 요새 브레다를 마침내 함락시켰다. 네덜란드가 에스파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벌였던 기나긴 투쟁인 80년 전쟁의 막바지에 일어난 일이다. 스피놀라는 브레다를 포위하고 11개월을 버티다, 브레다 총독 유스티니우스 판나소에게 시민들을 위한 영예로운 항복을 권유했다. 판나소는 이에 승복하고, 스피놀라에게 성문을 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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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브레다의 항복, 1634~1635년, 캔버스에 유채, 307×367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소장

두 장군의 만남은 글자 그대로 그림 같았다. 스피놀라는 말에서 내려 판나소를 기다렸고, 판나소 또한 걸어서 밖으로 나왔다. 스피놀라는 패장에게 예의를 갖춰 그의 용기와 결단력을 상찬했고, 휘하의 군대 또한 엄중한 명령에 따라 패배한 적을 조롱하거나 야유하지 않은 채 조용히 물러났다. 멀리 보이는 벌판에는 여전히 포연이 자욱해서 처절했던 전쟁의 현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거대한 그림 중앙을 차지한 건 상대의 명예를 존중하는 이들이 나누는 온화한 인사와 성문의 열쇠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4세는 이토록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그림을 주문해 궁전에 걸었다. 그러나 스피놀라는 이미 다른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다음이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화가 벨라스케스는 존경과 추모를 담아 영원히 남을 그의 얼굴을 그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