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달, 퇴사 결심] 셋째 날, 제주의 색

in #kr6 years ago

날이 정말 맑았다. 제주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처음으로 서부를 둘러보기로 했다. 제주의 해안 도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하귀-애월 드라이브 코스를 지나 애월을 구경한 뒤 인근의 더럭분교에 들르는 계획을 짰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도를 보며 정했다. 가고 싶은 곳들의 우선순위 목록이 있으니 당일의 동선만 고려하면 하루 일정이야 얼마든 만들어 낼 수 있었다.

blog_hyuksnote_jeju_day3_4.jpg

역시 가장 인기가 많은 해안도로다웠다. 이전의 제주여행에서 분명히 한 번 달려봤던 하귀-애월 코스였지만 그때와 지금은 또 달랐다. 중간중간 대여섯 번은 차를 세워놓고 풍경에 감탄했다. 비교적 한적한 시간이라 뒤차를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운전할 수도 있었고,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홀로 온전히 누릴 시간도 충분했다. 이리저리 풍경 사진을 꽤 찍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는 한 여성의 뒷모습이 주위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던 모습이다. 스냅샷 한 장 만으로 제주 바다의 풍경과 운치를 잘 담아내기란 쉽지 않은데, 그분 덕분에 두고두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아닐 수 없다.

blog_hyuksnote_jeju_day3_7.jpg

드라이브를 하며 속도감을 즐기고 싶을 때는 당연히 직선 도로가 좋을 테지만, 천천히 풍경을 즐기고 싶다면 구불구불 해안도로만 한 드라이브 코스도 없을 것이다. 오른편 조수석 창 너머로 바닷가를 두고 달리면서, 해안으로 불쑥 뻗은 길을 따라 우회전을 했다가 다시 좌회전을 하면 내륙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거침없이 바다를 향하다가도 어느새 아늑하게 바다를 품고 있는 제주도의 해안은 충분한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셨다.


blog_hyuksnote_jeju_day3_10.jpg

한담해안산책로 주차장에 도착했다. 적당한 공간에 차를 대고 조금만 걸어 내려가니 바다를 낀 호젓한 보행길이 나왔다. 애월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봄날' 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리로 걸어갔다.

blog_hyuksnote_jeju_day3_11.jpg

투명카약을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제주의 유명 관광지인 쇠소깍에서 타는 카약이 예약하지 않고는 탈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애월 바다에도 비슷한 레저 장소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후로도 해안가에서 몇 번 본 카약 탑승처들 중에서도 나는 애월을 으뜸으로 꼽는다. 단, 그날은 처음으로 보았던 데다 혼자서 탈 생각은 없었기에 알아만 뒀고 2주가량이 지나 동행과 함께 기어코 다시 방문했다.


blog_hyuksnote_jeju_day3_2.jpg

더럭분교를 방문했다. 세계적인 '컬러리스트' 장 필립 랑클로가 광고 프로젝트에 참여해 폐교 직전의 학교를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놓아 유명해진 곳이다. 주말이라 학교가 완전히 개방된 상태여서 마음껏 둘러볼 수 있었다. 평일에는 보통의 학교와 다름없이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공간이라 훼손 없는 보호가 중요한 명소다. 마침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있었고 아이들을 위해 준비했는지 색색깔 풍선까지 볼 수 있어서 기대 이상의 풍경을 누렸다.

blog_hyuksnote_jeju_day3_5.jpg

비눗방울을 따라 뛰어노는 어린아이들과, 이들을 찍느라 빙 둘러앉은 어른들. 연출이라 해도 좋을 만큼 더럭분교에서 본 풍경은 완벽했다.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문득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보니 무채색이 많았다. 생각해 보니 어릴 때는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을 좋아했던 것 같다. 크레파스도 색이 많은 게 좋았고, 물감도 팔레트 칸칸마다 최대한 여러 색을 짜 놓고 쓰던 기억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검정을 좋아하고 있다. 심플하고 시크한, 어딘지 '남자다운' 블랙이야말로 최고의 색이라 믿고 휴대폰이며 전자기기도 블랙 계통을 선호한다. 어느새 알록달록한 색들은 '유치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당연히 옷 색상도 무난한 게 좋다. 쓸데없이 튀고 주목받을 필요가 없으니, 차분하고 실용성 높은 색을 찾아 복장과 액세서리를 매치업 하는 것이다.

'색이 바래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나이가 든다는 건 곧 다양한 색을 잃어가는 것이라 하면 너무 어두운 얘기일까. 아직은 그런 말을 할 만큼 나이를 먹지도, 색이 바래지도 않은 청춘이라 자부해도 좋은 걸까. 아무튼 확실한 건 그날 제주 더럭분교에서 마음껏 본 파스텔톤 풍경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화사한 기분이 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지금 눈 앞에 있는 거뭇거뭇한 물건들과 입고 있는 회색 옷이 대비되어 나이 듦을 떠올렸나 보다. 확실히 여행은 할 때뿐만 아니라 언젠간 돌이켜 볼 과거로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확장해 줘서 좋다.


이 글은 개인 채널에 작성한 글을 재편집하여 업로드한 2차 저작물입니다.
(원문 주소 - https://brunch.co.kr/@hyuksnote/32)

Sort: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퇴사라는 말이 그냥 끌리네요. 제주 한달 살기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번째 사진이 참 좋네요.

마음에 들어서 처음으로 올렸는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