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요'라고 말해요"에 대한 생각
성폭력 예방교육에서 "성범죄를 당하지 않으려면 싫어요 안돼요 등 의사표현을 분명히 합시다."라는 말을 들은 적 있을 것이다.
이런 교육 메세지는 얼핏 '성범죄는 나빠요'하는 윤리적인 모양을 갖고 있어 보이지만 사실 "피해자도 원하기 때문에 성범죄가 일어난다"는 다분히 가해자 중심적인 정치 권력이 들어있다. 성범죄가 100% 피해자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구차한 설명이 될 뿐 그들에게 별 타격감이 없다.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 감수성에 젖은 생각을 포기 못하는 정치의 윤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미투운동과 권력형 성희롱 문제가 불거지자. 여성자체를 피하고 멀리하자는 펜스룰. 금욕프레임이 번지는 것은 가해자가 그간의 악행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다거나 하는 거룩한 현상이 전혀 아니다. 펜스룰엔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는 종교적 회심도, 타인에 대한 책임을 깨닫는 윤리적 자각도 없다.
펜스룰엔 "제가 잘못했습니다"가 없다. "저 여자가 사탄이야. 내가 아니라 저 여자가 나를 죄짓게 유혹한거지"라는. 끝끝내 피해 대상에게 죄의 책임을 지우려는 찌질함과 게으름이 있다. 펜스룰과 "'싫어요'라고 말해요"는 여러모로 닮았다. 윤리적인 책임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향한다는 점에서. 죽어도 자기 탓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든 곱게 포장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런 점에서 모 대형교회 L목사가 "나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여성을 내 차에 태우지 않는다. 마음 같으면 여성을 내 차에 태울때는 트렁크에 타라고 하고 싶다"고 자랑스럽게 설교하는 것은 유감이다. 여성에게 젠틀하게 굴고 옆좌석에도 태우고 다니시라 충고하는 것이 아니다. 혐오적 워딩을 설교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걸 부끄러운 줄 아시라는 거다. 당신이 설교시간마다 인용하는 예수는 이방인과 피가 섞여 버림받은 곳이라 불리는 사마리아 땅의 여성에게 직접 찾아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예루살렘 땅과 상관 없다고 말했다. 목사나 되는 사람이 여성의 존재를 죄의 감염인으로 소환하는 것을 부끄럽게 아시라. 그러다 벌 받는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가해의 책임을 오직 피해자의 것으로 포장시키는 윤리의 끝에는 예수도, 범죄가 예방된 세상도 없다. 그것의 끝에는 여성할례. 피해대상을 거세시키고, 입을 막고, 인격을 비하하는 잔악함이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을 가진 사람들이 얼핏 정치질을 선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곳(학교, 종교, 직장)은 정치와 분리되는 곳이야"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권력형 가해임이 분명함에도 "본인 꼬추 조심들 하시라"가 아니라 "여자 조심하라"고 말하는 풍토는 이미 정치적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대형교회 목사가 성적 거룩함에 대해 설교할때 "여성을 멀리하라"며 소수자를 사탄으로 소환, 정죄하는 식의 말 밖에 못하는 사회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것이다.
경건, 금욕프레임을 씌우는 문화일 수록 여성을 인격이 아닌 섹스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것은 유치한 역설이다.
"싫다고 말해요"든 펜스룰이든 거기엔 윤리의 형식은 있으나 윤리의 능력은 없다. 그것은 인격 대 인격으로의 만남보다 차별을 심어준다. 정치화가 잘못 이루어진 윤리가 생명력이 없다는 반증이다.
모든 윤리는 이미 정치적이다. 인간은 '바르고 착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당위적 책임 외에도 '바른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답해야한다. 윤리의 정치화가 필요하다.
가령 "화장실 몰래카메라에 주의하세요"라는 경찰서의 광고문구엔 "몰카에 찍힌 사람의 부주의가 문제다"는 불쾌한 윤리의 정치가 들어있다. 몰카에 부주의한 것이 바르지 못한 것이 아니다. 몰카를 찍는 사람과 그것을 보는 사람이 비윤리적인 것이다.
무엇이 피해자에게 조신하지 못했다며 화살을 겨냥하는지 살펴보자. 왜 성범죄 교육이 "싫다고 말해요"를 포기 못하는지 되짚어보자. 문제를 문제라 꺼내기 어렵게 만드는 정치원리가 작용한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대로 바르게 살 책임뿐만 아니라 동시에 바른 길을 찾고 더 곧게 펴나갈 책임이 있다.
공감되는 글 잘보고 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