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은 죄인도 피해자도 구원하지 못한다.
죄책감은 감정의 한 형태다.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 감정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죄책감은 일시적으로 작동하기도 하고, 평생 당사자에게 붙어서 그를 괴롭히기도 한다. 죄책감의 생존 기간이 무엇과 관계있는 지 아직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죄의 크기,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 여부 정도가 변수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린 일 가지고 일주일 내내 죄책감에 사로잡힐리도 없고, 이미 바로 잡은 일에 있어서도 죄책감은 다소 옅어질테니까. 그저 나의 가설일 뿐이다. 이 부분은 따로 연구가 필요하다.
죄책감은 당사자에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감정으로서 다가오고 때로는 삶을 집어삼키키도 한다. 해서 죄책감을 일종의 정의(justice)를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시선도 가능하다. 하지만 죄책감은 ‘형벌’치고 다소 엉뚱하게 작동한다. 죄책감은 당사자의 죄의 유무를 그다지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죄를 지어도 죄책감을 가지지 못하는 이가 있고,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자들도 있다.
죄책감은 죄를 죄로 인식하는 자들에게서 작동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려 노력하고 스스로에게 야박한 자들에게 죄책감은 일종의 형벌로서 작동하겠지만, 술집에서 옆에 있는 후배 문학인의 가슴을 주물럭거린 늙은 시인에게 죄책감은 무력하다. 그런 것들은 늙은 시인에게 전통이고 문화이지 잘못은 아니니까. 설령 스스로 그런 행위를 잘못으로 인식한다 하더라도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한다면 죄책감은 간 곳 없이 사그라든다.
늙은 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읽었을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의 앞 부분을 보면 살인마들도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사람 죽여놓고 개인 사정 타령하는 자들에게 죄책감은 감히 발을 들이지 않는다. 이재용 앞에서 무력한 사법부마냥.
한편, 죄를 짓지 않은 자와 ‘엄청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자책하며 필요 이상으로 괴로워하는 자에게 죄책감은 일종의 저주로서 작동한다.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자에게 죄책감이라는 ‘형벌’이 다소 무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부분은 의아하다. 죄책감은 대체 어떤 긍정적인 기능을 하나?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는 하나?
게임 <위쳐3>는 폴란드 작가 안제이 사프콥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한 판타지 배경의 게임이다. ‘위쳐’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일종의 종족(?)이다. 그들은 노란 눈을 가지고 있고, 마술을 쓸 수도 있으며, 특수한 포션을 만들고, 명상을 통해 체력 회복을 하기도 한다. 이런 능력을 가진 이들이니 변종 취급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일종의 용병으로서 각종 의뢰를 받기도 한다.
위쳐 중 한 명인 게롤트는 <위쳐3>에서 한 의뢰를 받는다. 오래되서 정확한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형인지 동생인지가 동생인가 형을 찾아달라는 의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막상 게롤트인 내가 동생인지 형을 찾으러 가니 그는 악령이 되어있었다. 모종의 일로 죄책감에 먹혀 인간성을 상실하고 악령이 되어버린 것. 죄책감이 멀쩡한 사람의 인간성을 상실하게도 만든다는 위쳐식의 표현이다.
나와 잠깐 특수한 인연을 맺었던 자가 죄책감에 대해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죄책감이 일종의 면피라고 했다.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당장의 필요한 실천을 피하기 위한 방법론이라고. 일리있는 주장이다.
죄책감 그 자체는 죄로 인한 피해를 바로 잡지 못한다. 즉, 죄책감은 피해(자)를 배제한다. 아무런 긍정적인 변화도 도모하지 못한다. ‘죄인’이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 피해자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면(혹은 알려지더라도) 피해자를 구원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죄책감은 그저 가해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가지며 그 잘못에 대해 아무 행위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죗값을 치르고 있다’면서 진정한 책임으로부터 도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죄인에게나 피해자에게나 생산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가해자도 평생을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다만 죄책감은 죄인이 죗밦을 치르지 못하게 막고, 속죄할 기회조차 앗아간다.
많은 이들은 크고 작은 피해를 일으킨 가해자들이 평생을 죄책감에 괴로워해야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가해자 역시 한 명의 사람이기에 구원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정으로 구원받아야 또다른 악행을 반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까.
죄책감이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그다지 효용이 없다면 가해자는 어떻게 구원받아야하나. 스스로 구원해야한다. 죄책감은 버리고 죄 그 자체를 인지해야한다. 죄를 인지하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지하되, 속죄 행위를 끊임없이, 평생 반복해야한다. 법관이 내려주는 판결이나 신을 대리한 자가 내려주는 면죄 따위는 그의 죄를 완전히 씻어내지 못한다. 죄는 저지른 이상 지워질 수 없다. 죄는 항상 그곳에 있고 나무 망치나 성경 따위는 죄를 없던 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피해자조차 그를 완전히 구원해줄 수는 없다.
성경책을 계속 연구(?) 하는 사람입니다.성경책대로 해도 죄는 없어져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성경책에서 죄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피로 덮는 방식(?)입니다.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그저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외쳐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없어졌다고 생각하며 죄에 대해 대담해지는 것을 볼때 저는 그사람들이 진정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말해보고 싶어 적고 갑니다 ㅎㅎ
일종의 저주란 말에 동감합니다. 문제 해결의 도구로 쓰기에는 필요한 효괄 못 내는 것도 사실이구요.. @홍보해
홍보해 포인트를 다 써 버렸군요 ㅠㅠ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합니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누구나 실수를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죄인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며 평생 진실되게 몸과 마음으로 속죄 행위를 실천하며 다시 태어나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