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2 (duet 이상)
#1
준비
준비가 되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준비는 하지 않았다
준비를 하기 위한 준비부터 시작했다
씻어야 하니까 치약과 비누를 사고
아 면도 크림을 깜빡했군
씻으려고 거울 앞에 서니 머리(카락)를 잘랐어야 하는걸 깨달았다
하지만 미용실도 안 씻고 갈 수는 없잖아
미용실을 가더라도 자신 있는 모습으로 가고싶어
그럼 일단 어제 생긴 뾰루지가 가라 앉길 기다리자.
#2
날짜
난 방 안에 오래 있었다.
그 시절 유일한 희망은 '내일'이었다.
내일이라는 다음주라는 내년이라는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인위적인 날짜 제도는
인류에겐 축복이다. 오늘은 쓰리고 아파도
내일은 다를 거라는 희망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하고 있는
그 대상에 차별이 없는 유일한 추상적 프레임이니 말이다.
나는 내일이 없었다면 아마 점점 침체되다가 급기야는 퇴화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방을 나설 수 없음'이란 대개 그런 것이다.
#3
거울
내 얼굴을 보여주는 니가 경이롭다.
외면의 미추는 기준삼지 아니한다.
사람은 그 눈으로 본인을 바라볼 수 없다.
너는 니 핸드폰으로 니 핸드폰을 사진 찍을 수 없으니 그 것과 같아
모든 것을 직접 보고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만이
진실이고 정답이라 여기는 인간이
자신의 모습만큼은 어떤 매개체 없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통쾌하다.
#4
난 오감도 15편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오감도의 오(烏)자가 조감도의 조(鳥)자에서 한 획을 뺀 글자라는 것은 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상태를 그린 것이 조감도인데 높은 곳에서 보고 있는 존재가
그냥 새인 것과 까마귀인 것은 어떤 차이가 있지?
사람에게 날개가 있었다면 분명히 인감도였겠지.
#5
13인의 아해 중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섞여있는데
1에서 13이라는 숫자가 언제나 1은 A를 의미하고 2는 B를 의미하고 그렇게 나아가
13은 M을 의미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헷갈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애초에 그 숫자는 어떤 존재를 특정하기 위한 숫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새가 어떤 새든 상관이 없다면 까마귀이면 안 되는 이유는 왜 존재하지
한 획만 빼도 된다는 사실은 운이 좋았어. 사실 모양이 아주 달라도 까마귀를 넣었을테니까
나중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