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모른다
대전 집에 내려가면 종종 엄마가 어렸을 적 앨범을 꺼내 보여주신다. 4권의 앨범이 있는데 성장일기처럼 누나와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과정이 담겨있다. 보통 한두 권의 앨범을 꺼내어 보는데 그중 엄마가 빼먹지 않고 꺼내어 보는 앨범이 있다. 두 살 무렵의 남자아이가 발가벗고 포도 먹는 사진, 청 멜빵 바지를 입고 바위에 기대있는 사진, 엄마 등에 업혀 잠든 사진 등이 담긴 앨범이다.
내 오른쪽 눈썹 위엔 푹 패인 자국이 있다. 크기도 크지 않고 가까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보이는 상처다. 하지만 엄마는 다른가 보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갑자기 아련한 눈빛으로 상처를 한번 쓱 만지고 “네가 어렸을 때….” 하며 얘기를 꺼낸다.
“아들 어렸을 때 수두에 걸려서 남은 상처야. 한두 살 때니까 기억 안 나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며칠 동안 차도가 없었어. 하루는 의사가 조용히 부르더니 죄송하다고. 마음의 준비하라고 그랬어. 그 얘기를 듣고 너 아빠는 마음의 준비를 한 거 같은데 엄마는 안 그랬어. 절대 포기 못 한다고. 치료 안 해줄 거면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다 포기했는데 엄마 혼자 포기 안 하고 매일같이 옆에 붙어서 기도했어. 살려달라고. 우리 아들 한 번만 살려달라고.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 의사도 그랬어. 기적이라고. 이 상처가 기적의 증거인 거야.”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에도 몸이 계속 허약했다고 한다. 배탈이니 눈병이니 매일 아파서 병원에 다녔고, 울음이 끊인 날이 없었다고 했다. 실제로 앨범에는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있는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는 어린 게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하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안아주는 것밖에 없었다고 했다. 엄마가 안아주면 울다가 스르륵 잠들곤 했는데 엄마 품에서는 그나마 오래 잤다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가끔 한 번씩 웃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고. 이 앨범 속에 그 모습이 다 들어있다고 했다.
퇴사하고 3주간 대전에 있었다. 하루에 글 한 편 쓰고 가만 누워있다가 저녁이면 엄마 따라 드라마 보다 잠드는 일상.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엄마와 같이 어벤저스도 보고, 평소 아줌마들이랑 자주 간다는 고등어구이집도 가고, 가끔은 마트에서 맥주와 땅콩을 사다가 소소하게 둘이 한 잔씩 먹고 자기도 했다. 그렇게 푹 쉬고 나니 다시 움직일 힘이 생겼다. 서울로 왔다.
서울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꼭 서울에서 해야 되는 거냐고 하신다. 그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돈 아낄 겸 대전에서 같이 있을까 물어보신다. 어딘가 조심스러운 느낌이다. 안 그래도 그럴까 하다가 아무래도 서울에 기회가 많아서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러냐, 청소 잘하고, 밥 잘 챙겨 먹고, 엄마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엄마한테서 다시 전화가 온다. 그래도 서울에 있어야지. 엄마 신경 쓰지 말고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아픔을 표현할 방법을 울음밖에 모르던 두 살배기 내가. 엄마 품속에서 안정을 찾던 때가. 어쩌면 엄마는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아픔을 자식에게 표현할 방법을. 지금껏 혼자 앓고 짊어지던 습관 때문에,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자식의 온기가 필요함에도, 괜찮다며 시리도록 쓸쓸한 아픔을 소리 없이 견디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모른다. 엄마가 어떤 아픔을 견디고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매번 괜찮다고만 하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곤 가슴이 꽉 차도록 안아주는 것뿐. 당신이 주신 생명의 온기를 나눠드리는 것뿐이다. 조만간 대전에 가서 안아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