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바스티아 연재(5)] 교환 VS 고립 – 자급자족의 허상

in #kr7 years ago (edited)

안녕하십니까 @jin90g입니다. 지난번에 학문과 종교에 관한 특집 연재를 마쳤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기초 개념 및 이론 검토로 넘어가려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는 언제라도 처음 자연법 장으로 넘어가셔서 공리 몇 개를 끌고 오시기 바랍니다. 항상 여기에 결부돼서 이야기가 인행되니까요

서로다른 본성을 가진 실재들과 그것들 사이에 성립하는 법칙이 존재한다.
모든 생물들이 고유한 생존·번영의 원리를 타고난다.
인간의 경우 사유능력과 자유의지를 타고난다
각 생물들의 자연상태는 각자 고유한 생존·번영의 원리를 통해 생육·번성하는 상태이다.
인간의 자연상태는 사유능력과 자유의지를 통해 생육·번성하는 상태이다.

자연법을 주장하는 정치학자들의 경우 사물들 사이에 성립하는 법칙의 존재는 대채로 동의하는 편이나,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가령 홉스는 인간이 서로 필연적으로 싸울 거라고 보기 때문에 ‘강력한 인공 신’이라 할 수 있는 ‘국가’가 모든 힘을 소유하고 위에서 억눌러 놔야 한다고 봤고, 루소는 순수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인간에게 어쩌다 보니 불순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과 언어능력이 생겨서는 세상에 타락해가고 있다고 봤죠.

반면 바스티아와 로크는 인간이 사유능력과 자유의지. 이성을 타고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회상태도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서 비롯한 상태로 보고 있죠. 로크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구분하고 있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사회를 구성해 사는데 알맞은 본성을 갖고 창조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바스티아는 한술 더 떨어서 사회상태는 인간의 자연상태다. 라고 봅니다.

자 그럼 우리의 주제, [교환] 바로 [시장경제]로 돌아와 봅시다.


제 3장 교환대 고립


자연법에 따라, 모든 생물들이 고유한 생존·번영의 원리를 타고난다. 자연상태는 생물들이 고유한 원리에 따라 생육·번성하는 상태이다. 만약 인간이 교환 없이는 생존·번영할 수 없다면, 교환은 인간의 자연상태다. 만약 교환이 인간의 자연상태가 아니라면, 인간은 고립되어 생존·번영할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교환과 고립 중에 인간이 생존·번영 가능한 상태가 인간의 자연상태다.

바스티아의 주장은 간단하다. 교환이 인간의 자연상태다. 인간에게 고립은 곧 죽음이니까. 그러나 바스티아는 무엇을 근거로 이토록 단호한 판결을 내리는가? 그는 두 공식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결을 내린다.

  • 고립 안에서, 우리 욕구는 우리 능력을 능가한다.
  • 사회 상태 안에서, 우리 능력은 우리 욕구를 능가한다.

이 두 공식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인간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고통을 겪게 되고, 죽는다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인간성 일반 법칙을, 그 중에서도 개인적 욕구를 정치경제학의 원리로 놓는다.

달리 말하면 정치경제학은 인간 본성의 여러 요소요소들 가운데 정확히 욕구 그리고 욕구와 관련된 요소들에 대한 학문이다.

정치경제학을 지배하는 인간성 일반 법칙의 기본 개념들은 욕구, 노력, 그리고 만족이다. 이 개념들은 인간이 감성을 타고났다는 사실에서 연역된다. 감성을 타고난 인간은 수동적 측면에서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 쾌락과 고통의 일반 관념은 직접적이고 명확한 여러 개념들로부터 도출되는데, 전자의 경우 즐거움이나 성적 쾌락 그리고 성취감이나 행복 등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 아픔이나 욕구 그리고 식욕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에 중간 상태가 존재한다.

다음으로 능동적 측면에서, 인간은 고통을 축소하고 쾌락을 증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의 일반 관념은 노고, 피로, 노동, 생산과 같은 직접적인 개념들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만족이 노력의 결과로서, 수동적 측면의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 현상의 총체 속에서, 감각이 노력에 앞서는 것도, 만족이 노력에 뒤따르는 것도 모두 개인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 욕구가 인간의 가장 주된 원동력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만족은 인간의 노력으로 제공되며, 다른 한편 만족은 자연의 무상증여로 제공된다. 대부분의 만족은 노고 없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불가피한 선택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존·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충분한 능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바스티아가 제시하는 교환과 고립의 공식이 참이라면, 인간은 오직 교환 안에서 충분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 필자는 바스티아가 어떤 방식으로 교환과 고립의 공식을 증명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3장 1절 욕구는 무한정(indéfini)하다


바스티아는 인간이 고립 상태에서 살 수 없는 이유로 욕구의 무한정성을 든다. 바스티아는 인간의 욕구가 무한정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무한정(indéfini)은 무한(infini)과 다른 뜻이다. 인간에게 진실로 무한한 것은 없다. 가령 인간은 허무로부터 존재를 창조할 수 없고, 사물의 본질을 마음대로 빚어낼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무한을 욕구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무한을 욕구한다면, 그는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욕구는 절대적인 한계를 갖는다. 인간은 신의 지위를 넘볼 수 없다.

반면 무한정은 부정형(不定形)을 뜻한다. 욕구는 동적이고 다채로우며, 측정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가장 동질적인 식욕조차 끊임없이 변화한다. 또한 인간은 허기를 채우면 색다른 맛을 찾고, 옷을 입고 나면 치장하려하고, 피난처를 얻고 나면 집을 꾸미기를 원한다. 우리의 욕구는 무한정성 속에서 변화하고 팽창한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욕구를 양적으로 다룰 수 없다. 게다가 욕구가 무한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의 다른 요소들도 무한정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이는 정치경제학에 들어오는 모든 요소들에 공통되는 관찰이다. : 부, 노동, 가치, 서비스, 등등, 초점(焦點)에 있어 극도의 운동성을 띄는 모든 것, 인간, 정치경제학은 기하학 혹은 물리학 마냥 계량 혹은 측량되는 사물들에 관한 사색에 대해 우위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 접근의 어려움이 있으며, 그 뒤에 오류의 항구적 원인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은 현상의 질서에 몰두할 때, 자연스럽게 기준을, 모든 것을 결부시킬 수 있는 공통의 척도를 모색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 인간의 욕구가 무한정하다면, 자연법에 따라서 인간의 능력 또한 무한정하다.

“이처럼, 자연이, 섭리가, 우리의 운명을 주재하는 힘이 진정 불쾌하고 잔인한 방해에 빠지지 않는 한, 우리의 욕망은 무제한적이고, 여기서 우리의 수단 또한 그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추론된다.

만약 인간의 능력이 무한정 하다면, 언뜻 보기에 무한정한 욕구가 고립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유는 아니다.

그러나 바스티아는 인간의 욕구와 능력이 항상 같은 비율로 확장되거나 변화하지는 않는다고 답한다. 상대적으로 비교할 때, 더 빨리 팽창하고 변화하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은 내달리고 수단은 쩔뚝거리며 따라온다. 그래서 한 개인의 능력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도 턱없이 모자란데, 바스티아는 각 사람들이 단 하루 동안에 혼자서는 수세기가 흘러도 만들 수 없는 여러 가지 것들을 소비한다는 것을 통해, 욕구와 능력 사이의 불균형을 보여준다.

<저자 주 : 같은 맥락에서 ‘매트 리들리’는 토스트 기계를 자급자족으로 만들려했던 예술가를 이야기한다. 몇 달에 걸쳐 막대한 돈을 투자한 그는, 전기 오븐과 같은 편법을 사용했음에도 시원찮은 제품을 만들었고, 결국 자급자족을 포기했다. 2009년 실험 당시 토스트 기계의 시장 가격은 4파운드, 한 시간분의 최저임금이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

결론적으로, 욕구의 무한정성 그리고 욕구와 능력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은 고립상태에서 인간이 생존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따라서 절대적 고립과 자급자족은 절대적 빈곤을 뜻한다. 인간에게 고립은 죽음이다. 그리고 만약 고립 속에서 생존할 수 없다면, 고립은 인간의 자연 상태가 아니다.

바스티아의 독창적인 점은, 그가 절대적인 고립의 불가능성을 다만 논증 가능할 뿐, 경험·관찰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내 정신에다 네 변이 아닌 삼각형을 증명할 수 있지만, 이를 증명하기 위해 나의 눈에 사각형인 삼각형을 보일 수는 없다. …… 마찬가지로, 내게 실험 증거를 요청하고, 나더러 살아있는 자연에서 고립의 결과를 연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내게 모순을 강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립된 인간과 생명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고, 사람들은 교류 없는 인간을 결코 내 보일 수 없으며, 그리고 결코 볼 수 도 없을 테니까.”

<저자 주 : ‘절대적인 고립’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다행히 우리는 ‘매트 리들리’를 통해 ‘상대적인 고립’의 예시를 볼 수 있다. 태즈메이니아 섬에 고립된 5000명 미만의 수렵·채집 부족은 대륙 본토 사람들과 단절된 후로 본토 사람들이 가진 기술을 대부분 상실했다. 섬사람들 사이에서도 교환이 있었지만 그 규모와 범위가 협소했고, 결국 퇴보가 진보를 압도했다. 이러한 퇴보는 ‘지능의 서서한 교살’ 사례로 불린다. 『이성적 낙관주의자』>

욕구의 무한정성 때문에, 우리는 정치경제학에 측정과 통계를 적용할 수 없다. 양으로 질을 측정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바스티아는 논리를 사용해 정치경제학 이론을 전개한다. 이와 같은 방법론은 바스티아가 장 바티스트 세에게서 배운 것으로 간주된다. 학자들은 바스티아의 연역적 방법론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인간행동학과 닮은 점을 봤고, 그를 오스트리아 학파의 학문적 선구자로 이해했다.

<저자 주 : 필자가 보기에는 바스티아와 오스트리아 학파 사이에는 학문을 다룸에 있어 데카르트 철학을 계승하는 독일 스타일과 프랑스 스타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둘 다 연역법에 의지하는데, 독일 스타일에서는 ‘A priori’ 선험·선천·초월 이라는 칸트 개념이 발견되고, 프랑스 스타일에서는 실체·본성 개념이.. 나중에는 현상이 주로 발견된다. 해당 차이는 상품의 가치·값어치 개념을 다룰 때도 나온다.>

다시 고립의 문제로 돌아오자. 바스티아는 고립의 논리적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다시 루소를 비판했다. 루소가 인간 욕구를 일정한, 그것도 매우 적은 수준의 고정된 양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바스티아가 보기에, 루소는 고립을 인간의 자연 상태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를 자연에 반하는 상태로 규정했는데, 사회는 관계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는 다니엘 디포의 소설(로빈슨 크루소)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그래서 바스티아는 루소가 인간의 욕구를 고정된 양으로 동물 수준의 극소량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했다.

“인간은 떡갈나무 아래서 배를 채우고, 시냇물을 발견하면 곧바로 갈증을 풀며, 먹을 것을 제공해준 그 나무 밑에서 잠자리를 발견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욕구는 자 채워진 것이다.”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루소가 말하는 원시적인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가진 수단이 미약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족시켜야 할 욕구 또한 단순하고 적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루소는 자연 상태를 찬미하기 위해, 인간을 결핍 속에서 행복을 이루도록 데려갔다. 단지 나는 이 부정적 행복이 공상적인 것이라고, 그리고 고립된 인간은 반드시 매우 적은 행복 안에서 죽을 거라고 주장한다. 루소는 거기에 ‘완전’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는 일관성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행복이 결핍 안에 있다면, 완전함은 죽음 안에 있을 테니까” (바스티아 『경제적 조화』

그러나 바스티아는 애초에 욕구가 양적 측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바스티아에게 욕구는 무한정하다. 필자는 그가 욕구의 다채로운 변화를 수량의 변화가 아닌 성질의 변화로 다루었다고 이해한다. 인간의 욕구를 단순하고 적은 수량으로 간주하는 것은, 단순히 생존에 필요한 양적인 수단을 인간의 내적이고 질적인 욕구 자체로 치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질과 수량은 서로 다른 것이므로, 이런 측정은 타당하지 않다.

<저자 주 : 질과 양의 혼동을 지적한 학자는 바스티아 말고도 여럿 있다. “힘을 쓰고 있는 팔에서 느끼는 고유의 감각은 상당히 오랫동안 일정하게 남아있으며, 무게감이 어느 순간 피로로, 피로가 어느 순간 고통이 되면서 거의 성질만 변할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팔에 흐르는 심적 힘의 연속적 증가를 의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알려주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만큼 그는 수반되는 의식적 운동들에 의해 주어진 심리상태를 측정하도록 부추김 받고 있다.”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욕구의 운동성과 무한정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생존·번영을 위해 무한히 성장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실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하여 월등한 능력을, 자유와 사유라는 이름의 은총을 갖고 있다. 동시에 우리 능력은 욕구의 빠른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은 욕구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립 속에서 우리의 욕구는 우리의 능력을 능가한다. 능력이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고통받게되고, 죽는다. 따라서 우리는 고립 속에서 살 수 없으며, 고립은 인간의 자연 상태일 수 없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까지는 고립이 인간의 자연 상태가 아니다
라는는 것만 논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왜 교환이 인간의 자연상태냐!”를
자세히 밝힐 수는 없겠죠.

이어지는 글에서는 교환이 어떤 본성을 가졌기에
인간의 자연상태인가를 하나하나 논증해보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사실 그 과정이 100쪽 분량되는 이 논문의
전부라고 할 수 있죠.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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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철학적 논증을 떠나 저는 개인 심정적으로 "교환"의 상태보다는 "고립"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아이를 셋을 낳고 북적대는 삶을 살다보니 홀로 있고 싶은 욕망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섯 식구의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져야하니 어쩔 수 없이 "교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네요... 교환이건 고립이건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느껴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는 남남이었던 부부를 맹세를 넘어서, 피와 살로서 한 몸으로 이어주는 또 하나의 나와 같은 존재라... 막상 저렴한 겂에 돌보미를 고용하라거나 어린이집에 보내라는 헛되고 샅된 조언은 쉽게 못하죠...
멋있는 아버지, 세 아이의 영웅으로서 하루하루 잘 버텨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