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art][단편 소설2/3] 공포의 예수상

in #kr7 years ago (edited)

title2-3.jpg


1편 링크
https://steemit.com/kr/@kc0084/kr-art-1-2


*4
부모님의 보호를 떠난 십대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가출 초반에는 교회에서 들고나온 헌금으로 어떻게든 지낼 수 있었지만 끝내는 일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고용주들의 첫마디는 항상 '부모는 어디 있느냐'였다. 교회에서 샌님으로 자란 나는 거짓말에 능하지 않았고 그들은 내 불안함을 감지했다. 아무도 나를 고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일은 있었다. 나는 내 처지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아닌, 내 처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했고 싼 값에 중요하지 않은 일을 도맡아 했다. 집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다짐이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 굶어죽지 않게끔 나를 움직여줬다.

하지만 문제는 교회였다. 아무리 지역을 옮겨도 그곳엔 교회가 있었다. 교회가 없는 곳이 없었다. 교외, 주택지, 시내, 골목 등 교회는 주변 환경을 막론하고 모든 곳에 존재했고 밤이 되면 약속이나 한듯 옥상 위 십자가를 붉게 밝혔다. 그것들은 마치 밤하늘에 그어진 균열 같았다. 이세계의 다른 존재들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하늘 표면을 그어 십자 틈을 만들고 인간을 훔쳐보는 것만 같았다.


crosss.jpg


나는 교회가 없는 지역을 찾기 위해 수 개월 내내 지역을 바꿨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동네를 찾을 수 있었다. 여자들이 몸을 파는 집창촌이었다. 그곳의 밤하늘은 십자가에 오염되지 않아 쾌청하고 아름다워 그제서야 답답함에서 벗어나 숨통 트이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집창촌에선 법보다 관습이 우선했고 따라서 나 같은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 미성년자도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처음 담당한 일은 새벽에 가게를 돌며 방을 치우는 일이었는데 그 댓가로 소정의 용돈을 받았고 기숙사에서 숙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고맙게도 그들은 '부모는 어디 있느냐'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허술한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됐다.

교인 부모님 품에서 자란 나에게 익숙한 환경은 아니었다. 그나마 누나들은 어리버리한 나더러 꼭 동생같다며 살갑게 대해줬지만, 삼촌들은 내 샌님 기질을 참지 못하고 무시하고 멸시했다. 삼촌들은 하나 같이 폭력성이 짙었다. 내 작은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냈고 업무 시간과 관계 없이 불러내 자잘한 개인 심부름을 시켰다.

하지만 폭력은 집창촌 생태계의 중요한 요소였다. 성욕에 굶주린 취객들이 잔뜩 몰리는 곳이라 종종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장을 통제하는 힘은 폭력이었다. 법, 규칙, 상식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오직 폭력만이 상항을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그들에게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삼촌들은 이곳에 속해 있는 한 자신의 숨길 필요가 없었다. 폭력은 더 이상 부끄러운 치부가 아니었다. 되려 그들의 밥벌이 생계이자 자랑스러운 특기였다. 삼촌들은 쥐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내게 환멸을 느꼈을지언정 나는 그분들에게서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따라서 아무리 심한 모욕을 들어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나 역시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달리 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늘 불안했다. 그럴 것이 집창촌 생태계 안에서 나는 너무나도 무능력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자' 역할을 해야 했지만 나는 폭력이 늘 생소했고 감정노동에 지친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곳에 속하지 못했다. '갈 곳 없는 십대'로 그곳에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점을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곳은 학교가 아니었고 그들은 교사가 아니었다. 매일 전장에 나가 전쟁을 치루는 전사들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찾았다. 나 역시 1인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인분 역할을 하지 못하면 나는 그 예수상이 서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5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니, 모지리 같은 나에게도 쓸만한 재주가 있었다.

집창촌 가게는 업종 특성상 오직 현금만 거래만 했다. 따라서 계산 실수가 빈번하게 발생하곤 했는데 다들 가난한 사람들이라 돈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덜 지급된 임금, 반복 청구된 자릿세, 출처 분명의 운용비 등의 돈 계산 실수는 어김없이 큰 오해로 번졌고 사람들은 그로 인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정확히 그 지점에서 내 주특기가 발휘되었다. 내가 몸담았던 곳이 어디인가? 그렇다. 교회다. 교회 역시 절대적으로 현금 거래다. 누가 감히 주님께 바치는 헌금을 카드로 결제한단 말인가? 신성한 일에 쓰일 돈을 누가 감히 악마 같은 과학의 힘을 빌어 송금한단 말인가!

매주 교일 저녁마다 나는 부모님과 한 방에 앉아 헌금을 세고 정리하고 기록했다. 작은 교회 주제에 헌금 계산이 뭐가 그렇게 대수냐고? 내가 집창촌에 눌러앉은 이유를 잊었는가? 그 아름답고 경건한 개같은 예수상이 세워진 후로 헌금은 몇 백, 몇 천 만원으로 늘었다. 나는 그 돈을 현금으로 받아 모두 손으로 세고 확인하고 기록했다. 아무리 자괴감에 허우적대는 나라도 돈 세는 일만은 세상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돈 세는 소년'으로 섭외 요청이 왔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된 적도 있다.

그렇다. 나는 돈 세는 소년이었다.


money.jpg


현금 계산의 생명은 신용이다. 따라서 검산이 쉬워야 한다. 계산이 틀리지 않아야 함은 기본이요, 계산이 정확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음이 필수다. 경험상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계산의 정확성을 의심했다. 그들의 의심을 잠재워주지 못한다면 현금을 다룰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계산이 옳았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한 눈에 확인이 가능한 인터페이스 구축이 우선이었다.

나는 현금 천 만원을 꾸역꾸역 손으로 세던 시절 사용했던 엑셀 파일을 변형해 가게부를 새롭게 꾸몄다. 그 달의 수출입, 지출 내역, 직원들 급여는 물론 공과금, 전기세, 인터넷 와이파이 사용료까지 모두 다 문서화하여 정리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급여 표를 작성해 급여 봉투에 동봉했다. 그리고 그 밑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문장 한 줄을 추가했다.

  • 문제가 있을시 언제든 말씀하세요.

결과는 기적적이었다. 직원 불만이 90% 감소했다. 찢어진 만원짜리가 들어왔다는 불만이 한 건 접수되었지만 곧장 깨끗한 지폐로 바꿔주고 고객 만족도 100%를 달성했다.

그날 이후 집창촌 모든 가게가 날 호출했다. 나는 마치 납치당하듯 이곳저곳에 끌려다녔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고 잠도 못 잘 정도였다. 한 번은 영 방법이 없어 삼촌들을 모아 가게부 정리 강의를 열기도 했다. 나는 열과 성의를 다해 내 가계부 정리 방법을 전파했다. 워낙 숫자 계산이 생소한 학생들이 많아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지만 난 집창촌 모두가 이 기술을 정확히 익힐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열심히 알려줬다. 사실 선의가 앞선 행동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지식 독점권을 내려놓아야 잠이라도 잘 수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불려다니다간 며칠 안에 아사할 게 뻔했다. 살아야 했다. 제발 좀 살아야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힘든 삶을 살아온 만큼 마음의 벽을 높게 쌓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벽을 넘어 자기 사람이 된 친구에게는 심장이라도 꺼내어 줄 만큼 진실된 모습을 보였다. 다정하고 친절했다.

나를 한식구로 인정한 삼촌들은 무작정 운동부터 가르쳤다. 남자는 힘이 좋아야 한다며 끔찍할 정도로 운동을 강요했고, 덕분에 나는 전에 없었던 건강함을 얻었다. 몸에 근력이 붙자 자신감이 샘솟았고 '좋다, 싫다' 라는 감정 표현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묘하게도 내 행동에서 옛날 아버지의 모습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 아버지 모습은 옛날 아버지, 나중 아버지 두 명으로 나뉘어진 채였는데 천만 다행으로 옛날 선했던 아버지의 행동이 마음에 더 선명히 남았던 모양이다.

당신이 그리하셨듯 나는 공동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참여했고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누군가 내 처지를 두고 짓궃은 농담을 던지면 화내지 않고 재치로 맞받아쳤다. 삼촌들이 술을 권하면 빼지 않고 걸판지게 놀았다. 물론 처음 술을 마셔본지라 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삼촌들이 주먹으로 주도를 가르쳐 준 탓에 주사는 금세 고쳐졌다.

그리고 오직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되뇌였다. 오직 사랑만이 내가 믿는 유일한 구원이자 정답이었다. 그런 날 보며 집창촌 가족들은 어린 놈이 까분다고 나무랐지만 그 힐난 속에는 따뜻한 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면 늘 마음이 외로웠다. 고향이 그리웠다. 내가 떠나온 친구들과 학교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가족이 그리웠다. 마음이 힘들 때면 슬쩍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여쭸다. 아버지와는 통화하지 않았다. 나도 당신도 대화를 원치 않았다. 사실 어머니와의 대화도 깊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어디 있는지 캐물으셨고 난 그 대답을 피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런 술래잡기를 끝내면 마음 한켠에 커다란 허무함이 남았지만 날 걱정해주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 어떤 영화보다, 그 어떤 드라마보다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의 교회는 더 이상 한적한 동네의 소규모 교회가 아니었다. 매일 전국에서 신자 수백 명이 몰려드는 대형 교회였다. 그동안 모은 봉헌금이 도대체 얼마였는지 새로 개장한 건물은 그 지역을 대표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외장이 화려했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매일 같이 교회 소식을 확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도 있었다.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 날 괴롭히는 예수상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사진으로 보니 전과 같은 격한 역겨움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혀 끝을 자극하는 시큼함은 있었다. 몸의 감각이 위험 신호를 발산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공포가 마음 속 어딘가에서 시커먼 존재감을 드리웠다.

그 뒤로 몇 번의 계절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날 나는 취객 하나를 제압해 택시에 구겨넣고 있었다. 누나들은 삼촌들이 취객을 제압할 때마다 숫자를 세줬는데 그 숫자는 전투력 같아서 삼촌들의 강인함을 측정하는 지표처럼 사용되었다. 내 전투력은 17이었다.

멀어져가는 택시를 보며 퉤, 침을 뱉고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켰다. 인터넷에 접속했더니 익숙한 이름들이 검색 순위 상위권에 보였다. 1위는 아버지 교회였다. 2위는 아버지 성함이었다. 키워드를 터치하자 관련 기사들이 떴다. 분 단위로 실시간 기사가 업데이트 되고 있었다.

기사 내용은 끔찍했다. 광기에 찬 신자 열댓명이 예배 도중 난입해 칼부림을 부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주변 신자들의 보호 아래 아버지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총 31명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