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족 배씨: 기원, 족보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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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배(pear)
배와 배달국 발고단 이야기.
배란 말의 어원은 좋은 것, 밝은 것, 가운데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영어나 한국어의 음이 같다.
배달국의 가장 높았던 성인 Babel(béibəl, bǽb麻姑城)탑은 배씨(白巢氏)씨족(族) 국가 형태로 상하 노예와 지배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통치자를 사람가운데라는 뜻으로 "배"라고 말한 것이다.바벨탑이란 히브리어로 "배달족 탑"으로 정상에 배나무 동산을 조성했고, 과일중에 으뜸이란 과일을 배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당시 채집과 수렵활동을 하던 신석기 시대에 배는 고혈압 배탈 같은 질병의 약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新唐書 발해의 오얏. 배 ) 배달국과 고조선 시대에 이미 배를 재배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신당서에 발해에 배가 약이라고 하는 점과 무종황제가 정신 이상증세와 배탈을 발해의 배를 달여 먹고 나앗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당시 배는 과일이 아니라 약으로 이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과일 중에 동양과 서양에서 명칭이 배(pear)라고 동일한 것으로 보아 배의 재배는 매우 오랜 역사로 전세계에 퍼져 있고 영국 이탈리아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사과에 이어 과일중 가장 많이 재배하는 과일로서 배탈에 좋으며 육류 섭취로 채 한 경우에 특효하고 당뇨 고혈압과 대변 기능을 도와주는 약리 작용이 우수하다. 배는 알칼리 성분이 뛰어나고 암을 예방하는 황산화물질이 많이 포함된 것으로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성분으로 구성된 과일이다.(고조선 이전부터 만주와 양자강 일대에 산돌배를 재배했으며 어떤 연유로 일본으로 언제 건너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배반명의 일본정벌로 건너 갔을 것이라 추정됨) 한국 토종 산돌배는 작고 상품성이 떨어져서 한국의 대부분 배는 일본배를 재배하고 있는 실정이고 맛이나 상품성이 일본배가 우수하다.
고조선과 달리 고구려라는 국가 명칭에서 계급사회 계급 국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적어도 배달국과 고조선은 통치자가 있었지만 권위주의적인 왕과는 다른 형태의 가운데라는 의미와 중요한 으뜸이라는 의미인 "한배검"에서 계급사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다나 강을 건너서 다른 세계로 가는 데 탈 것을 '배'를 타고 간다고 생각했다. 뗏목 중에 중요한 탈 것, 으뜸되는 탈 것, 천국으로 가는 탈 것이란 뜻으로 '배'라고 말 한 것이다.
인류최초로 옷을 입은 가운데 있는 사람이 곧 배씨의 유래로 옷감을 짜는 기계를 배틀이라하고 삼에서 짜낸 천을 삼배라고 하는 것이다. 배라는 말은 중요한, 가운데, 밝은빛, 하얀색의 말의 기원인 것이다. 단군의 씨족을 배씨라하고 돌배나무와 산돌배나무의 주인공 배골사람들 또는 배씨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일부는 한자로 白백씨로 사성하기도 했다.
ㅇ배씨의 기원과 족보,
배씨의 萬姓一家정신, 단군 이래 점차 쇠퇴하여 다른 성씨가 배씨로 창성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단일 계보 동계혈족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다면 신라 6부족이 동일한 집단에서 갈라진 석(昔)·정(鄭)·손(孫)·배(裵) 6성이 동계 혈족에서 분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더 나아가서 원삼국시대 초기 부여씨와 고씨 여씨가 동계 혈족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부터 부계에 따라 비록 배씨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전승되고 있으나, 萬姓一家라는 단군 정신에 따라서 모계를 萬姓에서 이어 가고 있다. 단군을 시조로 하는 배씨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 하듯이 무릇 萬姓에 자손들이 배씨와 같이 존귀하기 때문에 다른 성을 공경하고 예를 다하고 있는 가문에 풍습이 지금도 오래도록 유지 전래되고 있다.
1, 萬姓一家 檀君 계보, 밝음 가운데 한가운데라는 뜻의 배씨의 역사에 대하여,
배씨는 배달민족에서 보듯이 고조선에서 사용된 음독을 표시한 ‘한가분데’ ‘가분데’의 엤날 말로서 倍- 俳- 裴- 裵 당시 뜻이 밝은, 가운데, 집단이 우두머리라는 단군왕계를 표시한 성씨이다.
(昔 裵 단군계의 계보로 석씨는 가운데라는 의미, 박씨는 박달나무, 裵씨와 夫餘씨는 민족의 가운데(복부)라는 음이 ‘밝다’ ‘빛’의 당시 소리가 '볓’에 가까워서 길게 발음하면 부여가 됨에 차용한 성씨) 당시는 배씨와 석씨 부여씨가 확연히 구별되지 않고 어떤 집단 행사에서 책임자의 이름 앞에 붙여 준 것이다. 소벌공(蘇伐公) 우리말 소벌도리(일본말 소시모리) 소를 키우는 집단의 우두머리 앞에 단군을 표씨하는 裴씨를 붙여서 우두머리 중에서 우두머리를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
밝은 태양(sun)에 비춰지는 하얀 빛 가운데 씨족이란, 단군의 종족을 표시하는 “볏”이란 음을 내는 한자로 裵씨가 사용되었다. 우리가 복부를 배라고 말하듯이 가운데라는 지금 중국의 中자의 뜻을 품은 빛이란 말을 적은 글씨이다. 배꽃=하얀꽃 李花 (이씨와 혈족임을 알 수 있다) 夫餘 =붗 가운데란 뜻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과정에 큰 공을 세운 현경에게 '裵'씨 성을 사성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고려 이전에 이미 “밝은 빛 가운데” 배씨라는 집단이 단군왕계를 표시하고 있었으므로 현경에게 개국의 제1등 공훈으로 裵씨를 사성 한 것을 볼 때도 매우 귀한 존재라는 표시이다. 현재의 배씨의 족보들이 시조로 배현경(裵玄慶 고려)과 배지타(신라)의 후손에서 나온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배현경과 배지타 이전에 이미 배씨가 등장하고 있고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생긴 성씨로서 불행히도 배현경의 아들 은우(殷祐)로 후사가 단절되어 고려 태조가 애통해 하는 점이 기록에 있다.
배씨 가문에서 배현경을 시조로 모시는 파는 없었으나 조선 영조 때 합보운동이 일어나 배현경을 중시조로 모시게 하는 갑신위보(경주배씨 대족보, 1764)가 만들어 졌기 때문인데, 이유는 지타 이전과 이후를 밝힐 문헌이 실전되어 서로 다른 파를 이루고 있는 배문을 무후(無後)인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을 중시조로 삼아 한 파로 묶으려 했다.
갑신위보 이전의 기록으로 배문의 상계를 밝힌 대표적 기록은 1589년에 권문해가 지은 <대동운부군옥>인데 16세기에 확인된 배문의 현황.
"按羅史 我國之裵 其源出於 新羅6部 加利村之姓 興海 興海君 佺之後 星州 按家譜 以裵良메 爲始祖 其後之 仁卿爲大匡 封興安君 星州之裵 皆出於良메以 仁卿後最盛 金海 按金官志 裵爲本府大姓 麗末裵元龍爲大匡 封金海君 子孫蕃衍 大丘本府吏姓 間有脫吏籍 爲士族者裵廷芝大丘人 官之密直"
신라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배씨는 그 근원이 신라 6부의 금산가리촌의 대표적 성씨로 왕족의 딸이라고 기록되고 있다.(여기서 '왕족'이란 고조선 단군 왕족을 지칭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사성하기 이전인 배현경 이전에도 배씨가 이미 번영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삼국시대는 호족(豪族)이라 지칭되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였다. 이들은 신라에서 고려로 옮겨 가는 시대적 전환기에 새로운 선택을 강요받았으며, 그 선택은 그 지역의 존망과 직결된 것이었다.
나말여초의 전환기에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할거하여 세력을 떨칠 때 성주지역에는 이총언(李悤言)을 비롯한 양문(良文), 색상(索湘)등이 태조를 도와 활약하였다. 경산부 장군인 이능일(李能一), 배신(裵申), 배최언(裵崔彦)은 고려 태조의 통합 삼한의 때인 天授 8년 乙酉에 600인을 거느리고 태조를 도와 백제를 이긴 공로로 후한 상을 받았으며, 그가 살던 지역인 성산, 적산, 수동, 유산, 본피의 오현을 합하여 경산부로 승격하였으며, 모두 벽상공신삼중대광에 봉해졌다. 〈경상도 지리지. 상주도 성주목관조〉라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이후 후삼국시대에도 배씨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고려 초기에도 배씨는 배현경이 고려 개국 후 배씨로 사성받은 경우로 사성받지 않고 이미 개국공신 2등에 서훈된 배운태(裵運泰)와 궁예 막하의 장군인 배총규(裵悤規) 등을 보아 고려 개국 이전에 이미 배씨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려시대에 배현경 외에 배씨 성을 사성 받은 기록은 없는 걸로 보면 현재의 배씨는 배지타 소벌공에 연원을 둔 우수국의 동계혈족이다. 나말여초(羅末麗初) 배씨는 전국 각지에 흩어졌고, 그 중에 호족으로 성장하여 군(君)에 봉해진 성산, 분성, 달성, 흥해 배씨가 가장 번영할 수 있었다.
갑신위보(1764)에서 배씨는 지타 이후의 중시조를 배현경 으로 두고 -> 아들 은우 -> 은우 아들로 가공인물인 유(裕)를 만들어 내고 그 뒤에 분성배씨의 실제 시조인 평장사 헌(軒)을 두었다.
사전 등에 배현경의 현손이라고 되어 있던 배사혁은 사실 분성 배씨의 2세(헌의 아들)이며 공은 실제로 아들 셋 배원룡, 배천룡, 배운룡을 두었다.
첫째 배원룡은 분성군으로 봉군되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 배천룡을 성산군으로 바꾸었고
셋째 아들 배운룡을 달성군으로 바꾸었고, 가공인물인 넷째 배오룡을 만들어 흥해군으로 바꾼 것이다. (배씨는 모두 배현경의 후손으로 배현경의 현손인 사혁의 네 아들이 있는데, 첫째가 분성 둘째는 성산 셋째는 달성 넷째가 흥해군에 봉해졌다. 등등)
갑신위보 이전에 각 파에서 1세조와 시조로 모셨던 분들은 다음과 같다.
*성산배씨: 시조(1세)휘 위준(位俊)(삼중대광 벽상공신.년대미상)공의 4대손 휘 인경(仁慶)공께서 고려 충숙조(1315년경)에 흥안부원군에 봉작. (성산배씨세보)
*흥해배씨: 시조(1세)휘 경분(景分)(검교장군.년대미상)공의 5대손 휘 전(詮)공께서 고려 충숙왕8년(1321년)에 흥해군에 봉작. (고려사)
*달성배씨: 시조(1세)휘 손적(孫迪)(증 대호군.년대미상)공의 4대손 휘 천경(天慶)공께서 고려 공민왕3년(1354년)에 달성군에 봉작. (고려사)
*분성배씨: 시조(1세)휘 헌(軒)(평장사.년대미상)공의 손자 휘 원룡(元龍)공께서 고려 우왕조(1380년경)에 분성군에 봉작. (김해배씨세보)
경주배씨는 사관된 배현경의 대는 절손되었지만, 조선 성종 때의 인물로 경주처사의 호가 내려진 배충과(裵忠果)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배충과(裵忠果, 1473~1563)를 시조로 모시고 관향(貫鄕)을 경주(慶州)로 정하여, 현재까지 20여 대(代)를 계대승손(繼代承孫)하는 문중(門中)이다.
배충과(裵忠果)의 자(字)는 사문(士文)으로 일찍이 학문이 깊고 의술(醫術)에 능하였다. 빈민을 구제하고 생명을 구하는데 힘써서 중종조(中宗朝:1506~1544)에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제수 되었으며 경주처사(慶州處士)의 호(號)가 내려졌다.
공의 후손들이 공을 경주배씨(慶州裵氏) 시조(始祖:1世)로 삼아 관향(貫鄕)을 경주(慶州)로 하였고 공의 묘소는 경주시 충효동에 있으며, 경주배씨 5세(世) 동부녹사(東部錄事) 기인(起仁)공, 경주배씨 5세(世)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한손(漢孫)공, 경주배씨 5세(世) 이조정랑(吏曹正郞) 사손(師孫)공, 경주배씨 5세(世)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소흥(紹興)공의 후손들은, 경주(慶州), 광주(廣州), 포천(抱川), 여주(驪州), 화성(華城), 평택(平澤), 강화(江華) 등지로 산거(散居)하였다. (참고 : 배씨종사보감)
배씨의 기원을 모르는 후대에 와서 배씨들이 본관들도 서로 다른 시조를 모시며, 분적하지 않은 배씨를 경주, 달성, 흥해 등에서 분적되었다고 족보에 서술하기도 하고 있다.
곤산(곤양)배씨(昆山裵氏) (달성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나옴)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서훈되고 곤산군에 봉해진 배맹달공이 1세조이자 시조, 남해배씨(南海裵氏) (경주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나옴) 시조 배순(裵循)은 1470년(성종 1)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개성유수(開城留守) 역임하였다.
화순배씨(和順裵氏) (흥해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나옴).시조 배련(裵練)은 고려시대에 국자감(國子監)사(進士)가 되었다고 한다.
협계배씨(俠溪裵氏) (흥해배씨에서 분적되었다고 나옴).시조는 배진(裵縉)으로, 고려시대에 합문사인(閤門舍人)을 지냈다고 한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윗대가 없는 경우가 발생되자 다른 배씨에게서 분적 된 것으로 해결한 사례로 후에 사실이 밝혀져 원래대로 수정한 파도 있다. 강화도 마니산과 첨성대 삼랑성을 단군이 쌓았다고 하는 설화와 함께 그 후손으로 일컫는 삼별초 적관지대장군(참모총장) 배중손 같은 경우처럼, 단군에 후손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으면서 윗대의 족보를 가지지 못한 경우에 후대에 와서 분적으로 해결 한 사례와 아예 다른 김 이 박씨의 족보로 창성한 사례는 배씨도 예외가 되지 않으며, 구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에 많은 변화를 겪었었다.
참고문헌
日本書紀. 古事記. 三國遺事. 三國史記.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檀君世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 구빈마을 전설. 제왕운기. 위키백과사전.풍수지리신문.증산도.대종교.환단기고(사진출처:브레이크신문)(참고문헌 출처: 향토문화백과 사전, 백과사전, 민족족보, 민족의 유래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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