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감상에 대하여
Monroe Gallery of Photography, Santa Fe
“소설 속에서 인물을 내게 묘사해주는 그 모든 성격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비교해봄으로써만 그 인물을 알게 해줄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그 인물을 부호적으로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하나 관점은 나를 그 인물 외부에 위치시킨다. 그것들이 내게 주는 것은 그 인물이 다른 인물과 공통으로 지니는 것 뿐이며, 그에게 고유한 것은 아니다”
“내부에서 볼 때 절대는 단순한 것이지만, 외부에서 고찰되었을 때, 즉 다른 사물에 상대적으로 취해졌을 때, 절대는 그것을 표현하는 부호와의 관계상 언제까지 가도 화폐로 바꾸어줄 수 없는 금조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불가분하게 파악되는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세어지는 것은 본래 무한한 것이다.”
“분석은 대상의 주위를 돌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면서도 그 대상을 포착하려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이런 욕망 속에서 분석은 끊임없이 관점을 증가시켜가면서 언제나 불완전한 표상을 완성하려 하고, 쉼없이 부호를 바꿔가면서 언제나 불완전한 번역을 완성시키려한다. 그리하여 분석은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나 직관은 그것이 가능한 경우에는 하나의 단순한 행위이다.”
그렇다. 늘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 같다. 가슴으로 와 닿는 그런 사진, 아니 작품들을 좋아해 왔던 것 같다. 망치로 후려친듯한 일순 깨어짐과 공명을 남기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그 안에 담긴 복잡다단한 시공간의 무게를 재어볼 필요도 없이 하나의 실존 대 실존으로서 마주칠 때 느끼는 그 체험. 요제프 쿠델카의 사진들을 보면서,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을 보면서 마주치는 정서적인 충격과 공감 그리고 그 울림은 결코 이론적인 것도 아니고, 이성적 이해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들이 말초적인 것만도 아니다. 일전에 내가 어딘가 포스팅한 사진에 한 분이 달아주신 답글을 보곤 그런 생각을 문득 했었다. 도대체 공감이란 무어지? 충격이란, 울림이란 그 파괴적 속성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나를 그리고 누군가를 뒤흔들어 놓는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베르그송의 표현대로라면 사물의 내부로 우리 자신을 집어넣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결코 기호와 부호로는 도달할 수 없는 총체적인 반응이다. 더이상 논평도 무의미하고, 정치나, 철학이나 종교가 소멸해버리는 그저 그 자체로서의 무게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감정일거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과연 절대적인 하나의 지향의 합일일까? 알다시피 베르그송의 운동에 대한 정의는 늘 머릿속에서의 절대의 공간, 즉 말 그대로 형이상학의 공간 속에서만 일어난다. 현실에서는 상정할만한 절대적 지향의 한 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사물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충격이라고 울림이라고 공감이라고 말하며 느끼는 감정은 다 무얼까? 내가 사물에 대해 느꼈던 하나의 충격의 물량적 측면이 절대적으로 과연 누군가 다른 이의 가슴에서 일어나는것과 동일한 것일까? 만일 그것이 절대를 상정하는 하나의 지향이라면 능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에선 그런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동상이몽. 우리는 하나의 작품을 통해 각자의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어있다. 우리가 공감이라고 부르는 집단 최면 또는 집단 환각 속에서 꿈꾸어 온 바로 그 지향점이야말로, 우리 인식의 지평 너머에 존재하는, 말 그대로의 이상향일 것이다. 가끔 어떤 작품을 감상하며 느꼈던 감정을 누군가와 나누다 보면 전혀 다른 지점에서 서로의 감정의 재반응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동일한 언어로 동일한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발견한다. 물론 그 표면은 동일하거나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말이다. 직관인지 감각인지 감정인지가 모호한 그런 뒤죽박죽의 상황에서 서로 공감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며 서로 다른 지향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종종 겪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측면에서는 상업 작품들이 도리어 더 순수하고 정직한 편이다. 순수예술작품의 경우보다 더 동질적 반응을 끌어들인다. 그런 측면에서 직관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재반응은 순수의 측면보다는 상업적인 경우 더 적절하게 설명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직 나 스스로 직관적 방법론과 감각적 방법론과의 차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탓도 일부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올바른 관객을 정의하며 ‘관객이란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그것에 공감하며,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라고 격려해주며, 그에게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 공감과 격려 그리고 대화는 어느 지점에서 일어날까? 오히려 그것은 정치적, 철학적, 미학적, 종교적 위치에서 논리로써 일어나는 건 아닐까? 이전에 차이밍량의 ‘하류’라는 작품에 대해 한 평론가가 감독과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평론가는 주인공이 자전거가 타고 가며 다리 너머 어렴풋이 도시의 흐린 전경이 펼쳐지는 시퀀스를 지칭하며 가부장적 역사와 그 무게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했고 그것은 감독의 의도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올바른 공감이란 감각적 직관적 재반응이 아니라 작가와의 동반자적 관계를 통해 올바른 정치관과 철학적 세계관의 합일을 이루어지는 순간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순간, 신념의 투쟁 공동선상에서 우리는 동지이며 함께 걸어가는 친구임을 느끼기에 충분한것이다. 그리고 그 길이야말로 작가와 합일되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외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작품이 첫눈에 던져주는 정서적 충격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역시 오랜 시간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성장 과정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과 사상과 사유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맞닥뜨리게 되는 것. 바로 그 작품을 스스로 느끼고 바라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작가와 하나가 되어 진정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직관은 한걸음에 90걸음을 걸어가지만 결코 100걸음을 걸을 수 없고, 논리와 사유의 걸음이야말로 한 걸음부터 시작하여 결국은 100걸음의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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