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은 사실 9명. 이순신만 충무공은 아니었다.

in #kr6 years ago (edited)


<이순신 ost, 들으시면서 편하게 보세요>

000009.png

"충무(忠武)"란 최고의 무관을 기리는 시호


"충무공"이라 하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것입니다. 워낙 유명한 분이지요.

하지만, "충무(忠武)"란, 조선 시대 최고 무관에게 내려졌던 시호였습니다. 실제로 조선 역사에 있어 총 9명의 충무공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등 일본과의 전쟁이 가장 많은 충무공을 탄생시킨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 명나라 "악비" 등의 시호가 "충무"였던 것을 보면, 그 영향을 받은 시호가 아닌가 싶은데요.

5백년 역사에 9명 뿐이니 분명 최고의 무관에게만 내리는 시호인 건 확실한데, 과연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받은 시호인지, 따랐던 왕실에 잘해서 받은 시호인지는 각자의 혹은 역사의 평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9명의 충무공들 출생일 순으로 간단히 개요 살펴보고 그 공통점 및 특징 간단히 볼께요. 아마 몇 명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무려 노비 출신도 충무공이 된 사람이 있다는 점 흥미롭습니다.


9명의 충무공 개요


① 충무공 조영무(趙英茂, 1338~1414)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정몽주를 제거하고 정도전 일파 제거에 기여.

추후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 편에 서다보니 태조 이성계의 암살 지령까지 내려졌으나, 이를 모면하고 태종의 시대에 널리 쓰여 최고 영삼군부사(정1품)에 이르렀음.

세종이 "충무"라는 시호를 내림.


② 충무공 이준(李浚, 1441~1479)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로써, 세조 시대에 "이시애의 난" 등을 토벌한 공로로, 무려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심지어 28세에 "영의정"에 이르렀음.

그러나 추후 "정인지" 등에 의해 역모로 몰려 유배갔다가, 39세에 사망.

숙종 때에 복권되었고, 사망 후 4백년이 지난 고종 때에 와서야 "충무"라는 시호를 받음.


③ 충무공 남이(南怡, 1441~1468)

개국공신 남재의 손자로, 세조의 시대에 널리 쓰여 이시애의 난 및 여진족 토벌에 기여하는 등으로 무려 27세에 최고 병조판서에 이르렀음.

참고로 같은 나이에 "남이"에게 병조판서직을 물려주고 영의정인 된 자가 위의 충무공 이준이었음.

세조가 죽고 그를 좋아하지 않던 예종 시대에 이르자, 그를 시기하던 경쟁자 유자광 등에 의해 역모로 몰렸으며, 그를 따르던 한명회, 신숙주마저 돌아서는 통에 불과 28세에 저잣거리에서 효수되고 말았음.

그는 무려 350년이 지난 순조에 이르러서야 복권되었음.

유명 관광지 "남이섬"의 "남이"가 같은 사람을 뜻하나, 다른 곳에도 "남이"의 묘가 있기에, 실제로 "남이섬"의 묘가 그의 묘가 정확한지는 의문이 있음.


④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너무 유명한 대표적인 충무공이므로 스킵.

다만, 그의 조선 최고 계급은 정2품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급)이었기에 정승은 되지 못하였고, 정2품 정헌대부라는 벼슬은 왜란 시 조선에 투항했던 일본 장수도 받았던 장관급 벼슬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공적에 비해 아무래도 견제도 받고 무과 출신의 한계를 보인 것 같음.

그러나 그는 사후에는 비로소 정승이 되었고, 계속 승진하였음.

선조 때는 우의정과 좌의정에, 인조 때에 이르러 "충무"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사후 2백년이 지난 영조 때에 가서야 영의정으로 추증됨.


⑤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도 충무공이었음.

임진왜란 중 전세가 지지부진해지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바닷길 보급로를 지키면서도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진주성에 올인했는데, 관군 4천(의병 최대 1만 별도) 대 왜병 3만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조선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전쟁을 전환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음.

그는 숙종 때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충무공 시호도 받았는데, 영의정 추증은 무려 이순신보다도 빨랐음. 충무 시호는 이순신이 먼저 받았음.

국내보다는 일본 쪽에서 더 유명한 장군으로 알려져 있고, 일본에서는 다양한 소재로 다뤄지고 있음.


⑥ 충무공 이수일(李守一, 1554~1632)

그는 임진왜란 때에도 공이 있었으나, 인조에 이르러 "이괄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움.

형조판서를 마지막으로 지냈으며, 사후 좌의정과 충무 시호를 받음.


⑦ 충무공 정충신(鄭忠信, 1576~1636)

무려 나주 출신 노비에서 경상도별마절도사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

권율의 연락책으로 시작하여 선조가 전란통에 시행한 면천법에 의거 노비를 벗어났고, 형조판서 이형복의 밑에서 공부를 하여 급제하였으며 그는 정충신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음.

추후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으나, 후금과도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다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포도대장과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음.

광주 금남로 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라 전해짐.


⑧ 충무공 구인후(具仁垕, 1578~1658)

인조의 외사촌형으로 인조 반정에 기여. 그는 실제 실행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초기 기획에 참여한 공이 컸다고 함.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등 요직을 거치다가, 병자호란 때 3천 병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수호하였음.

이후 잠시 관직을 박탈당한 적은 있으나, 효종때에도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인정 받았음.


⑨ 충무공 김응하(金應河, 1580~1619)

선조 말기에 23세로 급제하였으나 평범하게 지내다가, 37세에 이르러 명나라가 후금의 침공 때문에 조선에 구원병을 청하자, 도원수 강홍립 등과 좌선봉장으로 참전하였음.

당시 부차령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했음에도, 3천 병사로 후금군과 맞서 고군분투하다가 불과 38세에 전사하였음.

그 공로와 투혼을 기려 명나라 신종이 요동백에 봉하고, 조선에서도 영의정과 충무공을 주었음.


아홉 충무공들의 공통점과 특징


① 충무공들의 공통점

9명의 개요를 살펴보시면 느끼셨겠지만,

최고의 무관인 "충무" 시호는 개국초기 혼란스러운 국가의 안정에 기여했거나, 큰 전란 혹은 반란 진압에 기여함으로써 결국 조선 왕실의 보전에 크게 기여한 자들에게만 수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000009.png

구체적으로는 태조/태종 즉위 및 안정에 기여 1명(=조영무), 세조 때의 반란 "이시애의 난" 및 여진족 토벌 2명(=이준, 남이), 임진왜란 등 일본과의 전쟁에 공헌 2명(=이순신, 김시민), 병자호란 등 후금(=청)과의 전쟁 4명(=이수일, 정충신, 구인후, 김응하)이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높은 자리까지 가는 와중에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견제 세력도 많아지게 마련이므로 대부분 중간에 정치적으로 큰 고통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6명이 이런 케이스입니다.

관직박탈, 백의종군, 유배 4명(=이준, 이순신, 정충신, 구인후), 암살지령 1명(=조영무), 효수 1명(=남이)


무탈했던 자는 극히 행동을 조심했던(=요직을 거부하며 권력 야심이 적었던) 1명(=이수일) 뿐이며, 그 외에 정치적으로 고통이 없던 자는 전사한 이들 2명(=김시민, 김응하)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순신은 정치적 고통도 있었고 전사한 케이스입니다.


② 특징

아홉 충무공 중 가장 많은 비중인 4명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사실 후금(=청)과의 전쟁에서 기여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큰 특징입니다.

아마도 워낙 굴욕의 역사인 측면 때문에 크게 부각되지 못한 측면도 없진 않을 듯 싶습니다. 나라를 지켰다는 측면에서 보면 일본과의 전쟁 만큼이나 후금(=청)과의 전쟁에 공헌한 충무공들도 재평가가 조금 필요할 듯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미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괄의 난 등으로 조선이 극도로 허약해진 데다가, 도와줄 명도 후금(=청)에게 지쳐가는 상황에서 후금(=청)의 공격 방어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또한 일본과의 전쟁 공헌으로 충무공이 된 이가 이순신 뿐 아니라 진주대첩의 김시민도 있었다는 점 기억할만한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한편 3~4백년이 지나 시호를 받은 이도 있는 것을 보면, 대체로 사후 오랜 기간이 지나서 복권된 사람일수록 아마도 논란이 많았을 것이며, 특정 정파가 배출한 왕의 입장에서 필요한 경우에 추증했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을 수 있겠지요.

또한 명나라를 위해 출정한 전쟁에서 산화한 김응하의 경우는 아무래도 명의 입장에서 고마운 사람이기에 공적 대비 좀 더 높은 레벨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 느낌이 살짝 듭니다.

※ 잠시 살펴본 일반인의 짧은 생각일 뿐이랍니다.

감사합니다.


관련 연재 글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1: 의외로 잘 모르는 3가지 『애국가』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2: 백악관이 불타던 그 때 태어난 『미국 국가』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2-2 : 『미국 국가』의 자유 vs 『자유의 여신상』의 자유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3: 작사자도 결국 숙청당한 『중국 국가』 & 모택동의 망언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4: 한국과도 인연 깊은, 비운의 『대만(=중화민국) 국가』

책 한권의 엄청난 나비효과: 태평천국의 난 (19세기 최대 군사분쟁)

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2)

미국을, 어쩌면 세계 판도를 바꾼, 단 한 장의 문서: 「스페셜오더 191」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5: 아직도 해가 지지 않은 『영국 국가 』

3.3운동을 3.1운동으로 바뀌게 한, 어쩌면 3.1운동을 못하게 만들 뻔한 한 장의 인쇄물 & 이를 두고 엇갈린 두 남자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6: 작곡자 만큼이나 콧대 높았던, 하지만 냉정히 볼 필요가 있는, 『독일인의 노래 』

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화가 지망생 히틀러를 집권자로 만든(?) 3가지 사건들

히틀러가 몰래 살려준 두 유대인들, 그 기구한 삶.

과거 일본이 한국에 무려 5만 구원병을 보냈던 대규모 전쟁이 있다? "백제부흥운동과 백강전투"

우리 역사상 최고로 황당했던(?) 전투, 고려와 후백제 간의 일리천(=구미) 전투

한 희생의 나비효과: 어쩌면 "Korea"란 단어가 사라질 뻔 했던, 공산(=대구 팔공산) 전투에서의 왕건의 기사회생

조선시대, 그것도 임진왜란 때 무려 정2품(장관급)까지 올랐던 파격적인 일본인이 있었다?


Sponsored ( Powered by dclick )

dclick-imagead

Sort:  

몰랐던 사실을 이리 소상히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디가서 아는척 좀 해봐야겠습니다.^^;

ㅎㅎ 요새는 좀 편하게 주로 그런 소재거리 위주로 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야사가 아니라 팩트 확인된 것이 대부분이니 마음 놓고 그러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멋진 글을 쓰시는 거 같습니다.
화이팅!!

ㅎㅎ 투자와 코인 정보만 찾고 쉴 때 혼자만 생각하던 역사 이야기 등을 우연히 스팀잇하면서 정리해서 올려보는 재미가 있네요. 뭔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지식을 접하고 공부하고 공유하고 그런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한 필력이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더 많이 기대하고 읽을께요~

재밌는 역사책 읽는 것 같습니다. 잘 봤습니다.

네 겉핡기 수준이지요. 후금과의 전쟁에서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들 하나하나 파보면 그때의 전쟁상황이나 조선의 여건 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푹 쉬세요!

충무공 지식 하나 넣고 월요일 시작~~합니다^^

댓글 디클릭.jpg

네 건강 잘 챙기시고 이번 주도 화이팅입니다!

몰랐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ㅎㅎ
디클릭도 누르고 갑니다ㅎㅎ

네 우리 역사는 그래도 찾아보면 웬만히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주변국도 몇개 없었구요.
미국사도 그런 면에서 좀 수월하게 공부가 되던데, 유럽사는 정말 ㅎㄷㄷ 하더라구요. 워낙 쪼개진 곳들이 많다보니 완전 난리더라구요. 방문 감사합니다^^

Hi @lostmine27!

Your post was upvoted by @steem-ua, new Steem dApp, using UserAuthority for algorithmic post curation!
Your UA account score is currently 4.291 which ranks you at #2545 across all Steem accounts.
Your rank has improved 41 places in the last three days (old rank 2586).

In our last Algorithmic Curation Round, consisting of 239 contributions, your post is ranked at #136.

Evaluation of your UA score:
  • Some people are already following you, keep going!
  • The readers like your work!
  • Try to improve on your user engagement! The more interesting interaction in the comments of your post, the better!

Feel free to join our @steem-ua Discord server

이제 역사도 배우고 갑니다ㅎㅎ 역사글도 많이 써주셨네요.

네 과거글들이 솔직히 좀 더 정성들여 쓴 것 같으니, 몇몇 글들은 정말 심심하실 때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와...김시민장군도 충무공이었군요.
다 첨듣는 얘기들입니다.

아 네. 저도 우연히 알고 정리해 보았어요.
진주성 전투도 당시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으로 알아요.
서울 충무로가 이순신이 살던 곳을 따서 지은 곳이니 가장 대표적인 충무공인 것 같습니다.

충무공이 최고 무관에게 내린 시호? 이군요.
500년 조선 역사에서 9명 뿐이었다면,
모두 대단한 공이 있긴 하겠군요.

철지난 글 이라 디클릭으로..
그런 면에서 디클릭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