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2 [한국학에세이] 13 한국 고승들의 서예와 선(禪)
➲ 선문화와 선미학(禪美學)
문화(文化)와 미학(美學)을 빼놓고서 한국학을 논할 수 없다. 공자는 인생이 깊어지는 과정을 “도에 뜻을 두고(志於道), 덕에 의거하며(據於德), 인에 의지하여(依於仁), 예에 노닌다(游於藝)”고 하였다. 무엇이든 완성의 단계가 되면 예술의 경지에서 노닐게 되고 어떤 분야든 깊어지면 선(禪)이 된다고 했던가.
현재 한국의 문화와 예술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한국문화의 저력에 대한 탐색의 일환으로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한국의 시(詩), 서(書), 화(畵), 음악, 스포츠 분야에서 선(禪)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내용들을 선문화(禪文化)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한국 근·현대 고승들의 서예에 담긴 서선일여(書禪一如)의 선미(禪美)를 살펴본다.
서예가 깊어지면 묵선(墨禪)이 되는 것인가? 어릴 때부터 붓을 잡으며 고금의 명필들의 서체를 많이 보아왔던 나는 출가 직후 속기(俗氣)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큰스님들의 서체를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특히 경봉스님, 서옹스님, 탄허스님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그분들의 독창적인 필선(筆線)에서 무심(無心)의 자성(自性)에서 우러나오는 나 자신만의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설사 왕희지(王羲之)의 필체와 똑같이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1600년 전 타인의 깨달음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자각의 과정을 거쳐 선필(禪筆)이 갖추어야 할 3대 요건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설정하여 지침으로 삼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육조시대 사혁(謝赫, 479~502)의 기운생동(氣韻生動), 청나라 화가 석도(石濤, 1642~1707)의 태고무법(太古無法), 조선 후기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불계공졸(不計工拙)이다.
<고화품록(古畵品錄)> 육품론(六品論)에 나오는 ‘기운생동’은 살아 꿈틀거리는 기운을 말하는 것으로 생명력 있는 개성이 없다면 선필이라 할 수 없기에 첫째 요건으로 삼은 것이다.
화가이자 스님이었던 석도는 태초에는 서법이니 화법이니 하는 것이 없었고 오직 일획(一劃)이 있었을 뿐이라는 ‘태고무법’을 주장했다. ‘한번 그음’의 세계는 불교의 일심(一心)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 무법에서 유법이 나왔고 무심에서 유심이 나왔으며 일획에서 만획이 나왔음을 의미한다. 먹물과 화선지의 찰나 간의 만남은 우리의 일생에서 동일한 하루가 한 번도 없는 것과 같은 절묘한 연기법의 선적(禪的)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불계공졸’은 추사가 노년에 낙관에 사용한 구절로 제주도 유배 이후 힘이 빠지고 원숙해지면서 잘 쓰고 못 쓰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무심하게 된 자신의 경지를 표출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것이 바로 추사체이다.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선필(禪筆)은 무심의 수행이 장기간의 발효를 거쳐서 도달한 향상(向上)의 세계라 할 수 있다.
➲ 경봉스님의 고졸(古拙)한 맛
경봉스님(1892~1982)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선지식이다. 평생토록 일기인 ‘삼소굴(三笑窟) 일지’를 썼는데, 이 속에는 온통 선지(禪旨)로 가득한 선시(禪詩)와 한문 문장들이 가득하다. 이를 보면 스님이 한학과 한시의 달인이었고 정통 선비의 탄탄한 서예 필력까지 두루 갖춘 고매한 선객임을 알 수 있다. 당대에 현판을 부탁할 경우가 있으면 사람들은 곧바로 영축산으로 달려가곤 했기 때문에 스님의 현판 글씨는 전국에 고루 퍼져 있다.
통도사 극락암의 ‘여여문(如如門)’ 글씨를 보면 스님의 선서(禪書)가 정통 서법을 오래 익힌 뒤에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양양 낙산사의 ‘원통보전(圓通寶殿)’ 현판에서는 노장의 소탈하고 꾸밈없는 격외(格外)의 고졸미(古拙美)가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이야말로 공졸(工拙)을 계산하지 않은 자자입선(字字入禪)의 전형적인 명품이라 할 만하다. 극락암을 참방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든지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소?”하고 웃으며 법담을 건네던 선로(禪老)의 풍골(風骨)이 글씨 속에서 오롯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 서옹스님 탈속(脫俗)의 멋
백양사 운문암에는 조계종 제5대 종정을 역임한 서옹스님(1912~2013)이 주석했었다. 임제의 종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스님은 <임제록>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을 계승하여 ‘참사람(眞人) 운동’을 주창했고, 붓을 잡으면 ‘수처작주(隨處作主)’를 즐겨 썼다.
스님이 글을 쓰는 동영상 화면을 보면 주먹 안에 붓을 움켜쥐고 쓰는 악필법을 구사하고 있다. 오척 단구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는 애초에 서법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고 오직 무심에서 나오는 한 획이 있을 뿐임을 잘 보여준다.
노년까지 주석하다 좌탈한 ‘운문암(雲門庵)’ 친필 현판의 ‘운(雲)’자와 ‘문(門)자’를 보면 평생 청아한 학과 같이 살았던 스님의 고고한 탈속(脫俗)의 멋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 ‘종남별업(終南別業)’의 한 구절을 쓴 작품 ‘행도수궁처 좌간운기시(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를 보면 일말의 속기(俗氣)도 찾아볼 수 없는 해탈의 경지를 누구든지 엿볼 수 있다. 평생 참선을 강조하며 참사람이 되라 가르치던 자상한 노고추(老古錐)의 미묘한 조사선(祖師禪)의 현관(玄關)으로 안내받는 느낌이다.
➲ 탄허스님의 쾌활(快活)한 힘
지난 세기를 통틀어 탄허스님(1913~1983)보다 많은 글을 쓴 스님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일생토록 매일 10시간 이상 만년필로 번역 원고를 썼고, 붓으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유묵(遺墨)을 남겼다. 만년필로 원고를 쓸 때엔 붓처럼 썼고, 붓으로 먹선을 남길 때엔 만년필처럼 썼다는 당신의 말씀처럼 스님의 기운생동하는 선필(禪筆)은 실로 종횡무진하고 자유자재했다. 그래서 스님이 남긴 서예 작품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필휘지의 속도감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오대산 문중의 원보산스님이 입적하자 그 상좌 스님이 탄허스님에게 병풍을 만들고자 하니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 스님의 곁에는 늘 글을 받고자 줄지어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기에 스님은 완곡하게 마다하는 뜻에서 백병풍을 하나 만들어 오면 써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49재 막재 당일에 정말 빈 병풍을 만들어 와서 써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향천사에는 춘성, 고암, 묵담, 일타스님과 같은 당대의 큰스님을 비롯하여 50여 대중이 모여 있었다.
탄허스님은 껄껄 웃으며 “안 써 주려고 그렇게 말했더니 진짜 만들어왔단 말이야?” 하더니 병풍을 밟고 올라가서 <원각경> 게송 한 장(章)을 거침없이 써 주었다고 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사실은 49재 참석을 위해 장삼을 수하고 있었던 터라 긴 장삼자락이 늘어져 써 둔 먹물에 옷이 버릴까봐 병풍을 반대편에서부터 썼다는 것이다. 병풍은 세로 글이라 원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대로 쓴다.
그런데 스님은 왼쪽 끝부분 8번째 폭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써 올라갔으며 첫 폭에서 마무리를 지었을 때 공백 없이 딱 들어맞았다고 한다. 현장에서 그 광경을 본 일타스님이 “나는 바로 쓰지도 못하겠다”고 하자 탄허스님은 “바로 쓰나 거꾸로 쓰나 병풍 하나 완성했으면 그걸로 됐지”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거침없고 쾌활자재(快活自在)한 필력은 탄허스님을 당할 자가 없었다.
➲ 글씨가 곧 그 사람
어디 이뿐이랴? 근현대 한국의 대선사 가운데는 경허(鏡虛), 만공(滿空), 한암(漢巖), 만해(萬海), 구하(九河), 석전(石顚), 청담(靑潭), 석주(昔珠), 원담(圓潭)스님과 같이 멋진 선묵(禪墨)을 남긴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계셨다. 이 짧은 지면에서 미처 다 거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글씨의 풍격이 곧 그 사람의 인품이라는 뜻의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다. 한국 고승들의 선필에는 깊은 선정과 수행을 거쳐 도달한 탈속의 통쾌와 순수한 기상이 녹아 있다. 벅찬 현대 한국 선문화(禪文化)의 현주소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