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반추反芻 (10)
반추反芻 (10) - 태식의 부모님과 문희와의 대면
“이제 저 약국 앞에서 우회전 하면 우리 집이야.”
태식의 집이 가까워 갈수록 문희는 더욱 초조해졌다. 그러나 문희는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싶었다. 문희는 태식의 부모님 허락이 중요치 않았다. 그 후에 닥칠 시련으로 인해 그동안의 태식과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 두려웠다.
태식의 집은 은회색의 철봉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스테인리스 대문이었다. 태식이 초인종을 누르자 어머니인 듯한 분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대문이 열렸다. 태식은 말없이 문희의 등을 밀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마당 오른쪽으로 커다란 백향목이 있었고 담 주변으로 동백나무가 즐비하게 심어져 있었다. 대문에서 두 세 개의 돌계단을 올라서야 마당을 밟을 수 있는 태식의 집은 아침부터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대문에서 현관문까지 20미터 정도 되는 곳에는 디딤돌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고 마당 군데군데에는 목련나무가 하얀 눈을 소복이 맞고 마치 꽃을 피운 것처럼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태식의 집은 한옥형태의 단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은 지 오래되었음에도 관리를 잘 한 탓인지 깔끔해 보이는 아담한 집이었다. 괘 넓은 마당에 심어진 나무들을 가로질러 열려진 현관문 앞에 태식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왔냐?”
빨간색 셔츠를 입고 있는 태식의 어머니는 태식에게 왔냐는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뒤에 따라오는 문희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문희가 태식의 어머니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어서 와요.”
현관문에 먼저 들어 선 태식이 뒤돌아보며 문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문희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반쯤 숙이고 핸드백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거실은 벽면 쪽으로 갖가지 분재들이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가족들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방문 쪽으로 앉아 방석을 깔고 신문을 보던 태식의 아버지는 문희가 현관문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일어서며 문희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이내 태식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란히 앉아 태식과 문희에게 앉기를 권유했다.
“이쁘기도 해라.”
다행히 어머니는 문희의 모습에 매우 흡족해 하는 것 같았다. 문희가 앉지 않고 핸드백을 놓은 채 큰 절을 올리려 하자 아버지가 만류하고 나섰다.
“절은 무슨 절, 그냥 편히 앉아요. 서로 얼굴 보았으면 그게 인사지 우리 식구가 될 때 그때 절을 받아도 늦지 않아요.”
태식의 아버지는 문희의 얼굴을 보며 그냥 앉기를 권했고 태식은 방석을 가져다주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문희의 모습을 보며 태식의 어머니가 편히 앉으라고 한사코 말했지만 문희는 그렇게 앉는 것이 편하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 우리 태식이 와는 어떻게 만났나?”
태식의 아버지는 부리부리한 눈에 얼굴은 구릿빛이었다.
“예, 저 장애인 봉사활동하며 만났습니다.”
“그랬군. 이 녀석이 장애인 봉사 다닌다고 집안에 붙어 있지 않더니 연예질이나 하고 다녔구만.”
태식의 아버지는 웃으며 이야기 했지만 문희는 얼굴색이 붉게 변하며 태식의 아버지와 태식을 번갈아가며 눈치를 살폈다.
“그래, 부모님은 두 분 다 무고 하시고?”
태식의 어머니가 마실 차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간 사이 아버지는 먼저 문희에게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에이, 아버지도 꼭 그렇게 심문하듯이 물어야 해요?”
“참, 내가 그랬나? 미안해요.”
태식은 마음이 불안했다.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도록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았지만 언제 또 물어 보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습니다.”
문희는 초조해 보였다. 아버지의 미안하다는 말에 가볍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핸드백 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이렇게 왔는데 뭐 줄게 마땅히 없네.”
태식의 어머니는 유리잔에 따뜻한 매실차와 사과를 깎아 놓은 소반을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요.”
“네.”
“자, 먹어봐! 이 매실차 아버지가 직접 시골에서 가져오셔서 만든 차야.”
태식은 추운 겨울 날씨처럼 꽁꽁 얼어있는 듯한 문희의 마음을 녹여 주듯 매실차를 문희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그래, 아버지는 뭘 하시고?”
태식의 어머니가 다시 문희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문희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보았다.
“돌아가셨어요.”
“저런, 어쩌다가 그렇게… 그럼, 형제는…”
“어머니와 위로 오빠가 있어요.”
“아이고, 오빠가 많이 힘드시겠구만. 그래 오빠는 뭐하시고?”
태식은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어머니, 아이 참! 나중에 차근차근 다 알게 되실 건데 뭘 그렇게 서두르세요?”
“넌 좀 가만히 있거라.”
태식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식의 아버지는 차를 마시며 어머니와 문희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네, 저…”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고 계세요.”
태식이 문희의 말을 막듯 얼른 어머니의 말을 받았다. 순간 문희는 태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빛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거짓말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첫 인사 자리에서 부모님이나 문희가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그래, 아버지가 안 계셔서 오빠가 가장 노릇을 하려면 많이 힘들거야.”
어머니는 문희를 위로하듯 다가서서 문희의 손을 잡아 주었다.
“참하기도 해라. 어쩌면 처음 보는데도 딸 같은 생각이 들까?”
“거, 주책없이 자꾸 거북한 이야기는 묻지 말아요. 이제 처음 집에 온 사람에게 자꾸 이것저것 물어 보는 것 아니오.”
가만히 있던 태식의 아버지가 태식의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좀처럼 문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다 갑자기 들킨 사람처럼 문희의 몸은 굳어 있는 듯 했다.
“문희씨! 제 방 구경할래요?”
“에구, 그래. 태식이 방에 가서 좀 쉬어, 내 집이 아니라 많이 불편 할텐데.”
태식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문희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문희도 가만히 일어나 태식을 따라 태식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문희씨, 미안해. 부모님이 하필 그런 걸 물어보셔서…”
“아뇨, 어차피 부모님들이야 가장 궁금해 하시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오빠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해서…”
“걱정마, 내가 나중에 문희씨와 우리 부모님과 친해지고 나면 적당한 시기를 봐서 말씀 드리도록 할게 그리고 문희씨가 거짓말 한 것 아니잖아. 내가 한 거지.”
“그래도…”
태식은 방문을 닫고 가볍게 문희를 안아 주었다. 문희의 눈은 어느새 젖어 있었다. 거실에서 태식의 부모님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태식의 어깨 위가 갑자기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태식씨… 미안해. 미안해… 내가 좀 더 좋은 환경이었다면…”
태식은 아무 말 없이 문희를 힘주어 끌어안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문희의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고 그 울림은 태식의 마음에 폭풍을 일으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