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18)

in #kr7 years ago



반추反芻 (18) - 결혼을 반대하다

며칠이 지나도록 태식의 어머니는 누워만 있었다. 모든 식구들이 어머니의 돌연한 행동을 궁금해 했지만 태식의 어머니는 간혹 한숨만 내쉴 뿐 아버지의 물음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거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문희 또한 태식을 만날 때마다 어머니의 일을 궁금해 했지만 태식으로서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토요일이었다. 봉사활동을 갔던 태식과 문희는 오랜만에 진석이와 함께 외출을 했다. 휠체어에 진석이를 태우고 몇 시간동안 그가 원하는 곳을 찾아 다녔던 태식과 문희는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 올 수 있었다.
먼저 미연동에 문희를 내려주고 집에 돌아 온 태식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거실에는 태식의 어머니 혼자 불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태식의 아버지와 형 태근은 먼저 잠이 든 듯 거실에는 태식의 어머니만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불을 켜며 태식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태식의 어머니는 눈이 부셨는지 움찔거리며 고개만 끄덕일 뿐 말없이 정원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태식은 마치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어색하고 어머니가 서먹하게 느껴졌다.
샤워를 한 태식은 편한 반바지 차림으로 갈아입은 후 어머니 앞에 다가 앉았다.
“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 뭐라고 이야기 좀 해 보세요.”
태식의 어머니는 물끄러미 태식의 얼굴을 바라보다 비로소 입을 열었다.
“태식아! 이 결혼 이야기 없던 것으로 하자.”
“네? 별안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유는 묻지 마라. 그냥 안 된다. 이 결혼 안 되겠어.”
“그냥 안 되다니요? 이미 날짜까지 잡힌 상태에서 안 되다니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갑자기 그러시는 거예요.”
“안 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아무것도 묻지 마! 무조건 안 돼!”
태식의 어머니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태식은 답답했다. 지금껏 태식과 문희의 결혼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던 어머니가 갑자기 문희의 어릴 적 가족사진을 보고 난 이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결혼을 반대하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동안 다정하고 온화했던 어머니가 자신 앞에서 얼굴을 붉혀가며 화를 내는 것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말도 안돼요! 어머니와 문희 아버지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요.”
태식의 의지는 분명했다. 태식은 일방적으로 어머니에게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식의 어머니는 아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외면했다. 그리고 다시 압을 닫은 채 정원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 밖 희미한 가로등엔 풀벌레들이 불빛에 마지막 생을 불태우려는 듯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 간 태식의 귀로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안방으로부터 들려왔다.
다음날 아침, 일요일 아침마다 운동을 나가셨던 태식의 아버지만 거실에 앉아 있었다.
늦은 잠에서 깨어난 태식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어머니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어디 가셨어요?”
“나도 모르겠다. 실성한 사람처럼 어딘가 전화하더니 일찍 집을 나섰다.”
“아버지. 어머니가 어젯밤 저에게 문희와의 결혼은 안 된다고 하시던데 아버지 무슨 말씀 들으셨어요?”
“나도 모르겠다. 나한테도 너와 문희의 결혼은 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만 하더라. 나 원 참 답답해서…”
태식의 아버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태식은 갑갑한 마음에 아침밥 생각도 없었다. 식탁엔 아침 일찍 어머니가 차려 놓았을 식사가 상보에 덮여져 있었지만 아무도 먹지 않은 듯싶었다.

“이렇게 아침 일찍 웬일이세요?”
미연동 근처에 있는 한 공원 벤치에서 태식의 어머니에 의해 불려 나온 문희 어머니는 태식의 어머니를 보자마자 의아한 듯 물었다.
“22년 전 온양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서경원이라는 사람 기억하세요?”
태식의 어머니는 작지만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네?”
문희 어머니는 갑자기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얼어붙은 사람처럼 일어 선 채 태식의 어머니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고 태식의 어머니는 그런 문희 어머니를 노려보듯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걸 태식이 어머님이 어떻게…”
“그랬군. 난 설마 했어. 그때 그 여자가 맞았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이미 태식의 어머니는 문희 어머니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칼날처럼 문희 어머니 심장에 내리 꽂혔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흥, 이제야 기억나는가 보군. 그때 일을 난 평생 잊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
문희 어머니는 벤치의 등받이를 붙잡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며 주저앉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말도 안 돼.”
“그래, 당신이 했던 일은 말이 되는 거고?”
태식의 어머니는 벌떡 일어서더니 문희 어머니를 쏘아보며 말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은 그렇게 있었다.
공원엔 간혹 늦은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두 사람을 쳐다볼 뿐 공원은 너무나 조용했다.
“태식이 어머니! 문희에게 만은, 문희에게 만은 말하지 말아 주세요.”
문희의 어머니는 갑자기 앞에 서 있던 태식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것은 애원이었다. 마치 무릎을 꿇은 듯 벤치에서 내려앉아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 놔! 이것 놓으란 말이야!”
태식의 어머니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문희 어머니의 손을 뿌리쳤다. 문희 어머니의 눈에서 떨어진 굵은 눈물방울이 벤치 앞 흙바닥을 적시고 있었고 소리를 질렀던 태식의 어머니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흙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문희 어머니를 뒤로하고 태식의 어머니는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