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반추反芻 (9)
반추反芻 (9) - 태식의 집으로 인사 가던 날
첫눈이 내렸다.
토요일, 거리에는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날씨가 추웠음에도 첫눈을 반기는 듯 환한 표정으로 출근길에 오르고 있었다. 거리마다 수북이 쌓인 눈으로 교통이 정체되기도 했고 곳곳마다 빙판길이 되었지만 태식도 문희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날 첫눈이 오는 것이 부모님의 환한 얼굴처럼 푸근해 보이기까지 했다.
들풀회 사무실로 들어 온 태식은 먼저 와 있는 사무국장 오동민과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따듯한 커피를 한 잔씩을 나누었다. 자주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달에 두 번 정도 토요일마다 나와 밀린 들풀회 일을 처리하는 오동민 사무국장은 25살인 태식보다는 세 살이 많은 들풀회 선배였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지만 유머감각과 남다른 봉사 열정으로 많은 회원들이 그를 따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태식은 늘 단 둘이 있을 때에는 그를 ‘선배’라고 불렀다. 그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깍듯이 사무국장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둘이 있을 때는 다정하게 선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선배, 오늘 문희씨 우리 집에 인사시키러 가는데 결혼 선배로서 뭐 조언 같은 것 해 줄 거 없어요?”
소아마비였던 그도 역시 1년 전 같은 들풀회 회원인 손미숙과 결혼한 터였다. 그도 결혼하며 처갓집에서 소아마비라는 이유로 결혼승낙을 받아내기까지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래? 잘됐네. 축하해!”
“축하는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걸요.”
이미 태식과 문희의 사이를 알고 있었고 또, 문희의 가정환경을 태식으로부터 듣고 있었던 오동민은 태식에게는 좋은 조언자가 될 것 같았다.
“조언이라… 뭐, 그냥 부딪치는 거지 뭐. 자식이기는 부모 봤어?”
“참 내, 선배도… 뭐 좋은 조언이라도 해 주라고 하니깐 겨우 그 말밖에 못해요?”
“뭐 문희씨 예쁘겠다. 뭐가 문제야? 문제라면 문희씨가 부양해야 할 가족들인데 그건 사위도 자식인데 당연히 함께 져야할 의무 아니겠어? 물론, 태식이 부모님 반대가 심하시겠지 하지만 어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어? 힘내라구.”
오동민은 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힘주어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태식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식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거쳐야할 과정임을 생각할 때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식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단 부모님에게는 문희씨의 가정환경을 비밀에 붙였다가 문희씨가 자신의 집에 자주 놀러오며 부모님과 형제들과 친해지고 나면 그때 이야기하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태식은 점심때가 되어서도 식욕이 없었다. 선배 혼자 먹으라며 한사코 식사하기를 거부한 태식에게 오동민은 일방적으로 자장면 두 그릇을 시켜서 먹게 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이 다 배고픈데서 나오는 거야! 앞으로 힘든 일을 여러 번 겪어야 할 텐데 먹고 힘내야지.”
오동민의 권유에 못 이겨 자장면을 먹기는 했지만 그날따라 유달리 속이 끓어 오르는 듯 했다.
오후 2시쯤, 문희가 올 시간이 되자 태식은 마음이 바빠졌다.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다시 깨끗하게 했다.
“태식씨!”
“우와! 문희씨 맞아요?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 같네. 걱정하지 말아요. 태식이 부모님도 문희씨 모습 보면 한 눈에 이게 웬 횡재냐 싶으실 테니깐.”
오동민은 들풀회의 수입지출 현황과 연말 총회 때 보고해야 할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문희를 보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문희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문희는 환하게 웃었고 태식은 내심 선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문희에게 큰 힘이 되는 말이었다.
“문희씨, 정말 예뻐.”
“정말이요? 잘 어울려요?”
새 옷을 입은 문희의 모습은 며칠 전 옷을 사며 밤에 불빛아래서 보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검정색 바탕에 옷깃은 흰색 줄로 장식된 투피스에 연회색 코트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한 눈에 들어왔고 더욱이 문희의 하얀 얼굴이 또렷하게 부각되었다. 마치 오늘을 위해 첫 눈이 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태식의 머릿속에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서둘러 가자.”
태식은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께 문희를 보여 드리고 싶었다. 태식은 문희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참, 좋을 때다. 태식아! 그래도 선배한테 인사는 하고 가라.”
태식은 뒤에서 소리치는 오동석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은 오동석이 빈말로 하는 소리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무실을 빠져 나온 태식은 자신의 프라이드 승용차의 문을 직접 열어주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태웠다.
“저, 문희씨! 일단 집에가서 부모님께 인사하고 혹시 부모님이 가족사항에 대해서 물으면 그냥 문희씨는 잠자코 있어 내가 알아서 이야기 할게, 알았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태식은 자신의 집이 있는 동림동 쪽으로 향하며 문희에게 말했다.
“혹시 문희씨의 가족사항을 알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그건 안 될 말이에요. 태식씨! 물론, 오빠도 그렇고 저희 집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오빠나 엄마를 팔아가며 태식씨 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지 말아요.”
“그런 뜻이 아니라 일단 문희씨가 우리 부모님과 친해지고 난 후에 말씀 드려도 늦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야.”
“아뇨. 그냥 사실대로 말씀드릴래요. 그리고 그 이상으로 태식씨 부모님께 노력할래요.”
“고집은…”
태식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문희의 모습이 비장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문희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그런 말을 해 놓고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태식은 모아진 무릎 위에 단정히 모으고 있는 문희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코트 소매에 앙증맞게 달린 토끼털과 함께 잡힌 문희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나 무척 행복해, 문희씨가 잘 해내리라 믿어. 사랑해…”
처음 문희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했다. 비록 좁고 낡은 자신의 차 안이었지만 태식은 그동안 더 좋은 방법으로 말하려고 별러왔던 말을 비로소 꺼내었다.
태식의 손 안에서 문희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그녀는 대답대신 향기롭고 풋풋한 사과향이 나는 자신의 머리를 태식의 어깨로 기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