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유 (7) : 감각의 단계 下 '사유 감각'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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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유 (7) : 감각의 단계 下 '사유 감각'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정확히는 문자가 새겨진 어떤 것) 또한 나의 순수 사유 일부가 근원 감각으로 회귀한 것이며, 나를 포함한 이 글의 독자는 이 순수 사유의 조각을 감각 사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행해지는 감각 사유는 우리가 일반적인 물질을 대상으로 한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감각 사유는 감각에 내 생각을 붙이는 형태다. 하지만 생각을 저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비물질적 물질에 대한 감각 사유는 해당 물질과 그 감각에 대한 생각도 물론 존재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 물질에 내재된 생각에 생각을 덧붙이는 형태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어떤 물질을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유를 감각하는 것이며, 감각된 사유에 대한 사유를 행하는 것이다. 이는 비물질적 물질 중에서도 보다 더 사유를 목적으로 한 물질에서 비롯되므로 이를 비물질적 물질에 대한 감각 사유를 넘어서 ‘사유 감각’되었다고 한다.

순수 사유 → 사유 중심의 비물질적 물질 → 감각 사유 = 사유 감각

'사유 감각'은 육체의 감각이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재된 우리의 자아, 순수 사유로 이뤄진 의식이 직접 감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책이나 음악, 영화를 보고 내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이 내 순수 사유 안에 잔존하면서 계속적인 영감을 주는 상태를 경험한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 이질적인 사유를 ‘감각’하고 있는데, 이때 감각되는 생각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발현시키는 뇌의 작용, 비물질적인 의식 속에서 감지되는 것이다. 사유 감각은 우리가 사유를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특히 순수 사유로 구성된 ‘나’에게는 그 존재를 구성하는 재료와도 같을 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구성되느냐에 따라 매번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유 감각된 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저 생각을 감각함과 동시에 감각 사유한 것일 뿐이므로, 그것이 어떤 뛰어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유 감각을 자유자재로 한다고 해서, 높은 차원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거나, 훌륭한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사유 감각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다. 우리가 도시를 거닐며 무수한 것들을 감각 사유하고 그것을 만끽하지만 그 모든 부분을 사랑하지는 않듯이, 사유 역시 평범한 것과 훌륭한 것이 온데 섞여 도시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별 다른 의미 없이 사유 감각할 뿐이라면, 사유 감각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유 감각할 만한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순수 사유를 논파할 만한 생각들이고, 또 하나는 나의 순수 사유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길 원하는, 나의 의식이 즐거워하는 생각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며 살기로 한 이상, 보다 더 나은 생각을 추구하게 된 이상, 우리는 비물질적 존재인 ‘나’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순수 사유가 당연히 ‘더 나은 형태’로 등장하기를 원한다.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엉성한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점차 소묘, 풍경화를 그리게 되고 종래엔 고흐나 피카소를 넘는 그림을 얻길 원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면 먼저 우리는 추구하고자하는 생각의 가장 훌륭한 형태의 것을 부지런히 좇아봐야 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사유 또한 함께 습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사유 감각하며 다른 좋은 생각들을 논파하거나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을 타인에게 사유 감각 시키며 그것이 논파되거나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지켜볼 필요도 있다. 타인이 나의 사유를 사유 감각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써 감각 사유 한 것을 내가 다시 사유 감각하는 그 과정, 그것은 내가 진정 의도한 대로 사유를 받아들이게 됐는지, 나의 순수 사유 영역이 그 스스로 추구하는 영역을 뛰어넘는 것들로 차오르고 있는지 분별하는 좋은 가늠자가 된다. 그래서 그것을 원활하게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사유 감각코자 하고, 더 많은 사유재생기들이 나의 사유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봐야 한다. 그것이 대화가 됐든 전시회가 됐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어떤 영역을 향해 무한히 반복된 사유 감각은, 나의 순수 사유를 더 나은 형태로 ‘등장케’ 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나’ 역시 훌륭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게 된다. 그런 훌륭한 생각 하나하나가 모여 나의 순수 사유를 구성하고 순수 사유의 집합이 곧 ‘나’라고 했을 때, 그땐 비로소 ‘나’는 보다 훌륭한 형태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알고 훌륭하게 모방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나의 본질’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좋음, 나라는 존재의 사유가 원하는 지식과 생각들을 강하게 붙들고 이어붙일 수 있는 생각들을 쫓는 것으로써, ‘내가 나보다도 더 강하게 나를 추구하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육체의 속성과 무수한 사유의 방해물로부터 순수 사유를 저해당하고 있다. 그때 우리의 본질을 알고 깨닫고 있다면, 이것을 유지시킬 수 있는 일종의 ‘자극’을 두고 지속적으로 감각시킬(사유 감각으로서)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비물질적 물질에 달려있다. 그런데 특히 두 번째의 목적은 순수 사유 자체에 대한 갈망뿐 아니라 보다 육체적인 감각 사유의 영역도 함께 이끌어낼 때가 있다. 사르트르와 까뮈가 ‘카페 드 플로르’를 애용했듯, 한 철학가가 그 자신의 철학을 진보시키기 위해 형이상학적 사유를 탐닉하면서도 그것이 가장 원활하게 진행되는 상태, 조용한 카페나 우아한 사람들이 있는 분위기 그 자체를 원한다면 그것이 ‘의도된’ 물질들을 찾아다니게 될 수도 있다. 이때 우리에게 감각 되는 것들은 대부분 감각 사유될 뿐이어서 사유 감각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보다 나은 사유 감각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물질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것의 참된 의미는 돈을 밝히지 않는다거나 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 주변을 나를 정의하는 요소들로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질이 나를 위해 헌신하는 상태, 내가 물질을 지배하는 상태를 만드는 것으로, 나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고 그것이 내게 어떤 사유를 하게끔 자극하는 그런 상태를 추구하는 인간이야말로 제대로 사유 감각을 즐기며, 또한 잘 활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더 나은 존재, 더 원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사유 감각과 그 근원인 비물질적 물질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의 가장 우수한 형태를 좇고 성형하며 그런 것들을 주변에 오래도록 두고 행하라. 그것이 사유 감각이 추구하는 본질이다.


<인간과 사유>

인간과 사유 (7). 감각의 단계 上
인간과 사유 (6). 사유는 힘이다 下
인간과 사유 (6). 사유는 힘이다 上
인간과 사유 (5). 예술은 왜 훌륭한가
인간과 사유 (4). 사유가 즐겁다면 가장 재미있는 건 인간 세계다
인간과 사유 (3). 생각의 본모습과 나의 본모습
인간과 사유 (2). 부와 사유
0. 신은 존재하는가?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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