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총선 이브

in #kr6 years ago

1988년 4월 25일 음모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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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25일 오후 내 가슴은 뛰고있었다 .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 수업 한 시간을 날려먹은 채 나는 학교 앞에서 명동으로 가는 34번 버스를 기다리면서 530 명동 상업은행 이라는 단어를 주문처럼 되뇌고 있었다 . 정거장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눈들을 빛내고 있었는데 신입생들도 많아서 나도 동문을 둘씩이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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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른바 '가두투쟁'을 나가는 이들이었다 내 기억에 88년 신학기 이후 첫 가투였다. 같이 있던 87형이 목소리에 힘을 팍 주며 말했다 . “앞으로 명동으로 출퇴근하게 될 거다. 사안이 사안인만큼.” 그럼 무슨 사안이었던가. 그걸 말하자면 얘기는 87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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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의 친구이자 후계자 노태우가 당선됐다. 조선일보의 고바우 만화에서도 “죽쒀서 개 준다”고 안타까워했거니와 6월항쟁을 바로 6개월 전에 치룬 나라에서 군부독재의 수장 중 하나인 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은 그 자체로 황당한 일이었으며 그 결과 요즘 용어로 하면 '멘붕'이 집단적으로 발생했다 그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김영삼이었다 . 그는 자신과 김대중을 동시에 돌려앉힌 대통령 선거를 원천적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노라 선언한다 . 그리고 3.15부정선거에서 4.19 까지 한달이 걸렸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그와 김대중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까맣게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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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공명정대한 선거는 절대로 아니었다. 공정선거감시단이 습격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군인들은 내놓고 1번을 찍으라는 압박을 받았다 구로구청에서는 의심이 가는 투표함을 두고 점거농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수십 년 집권한 군사파쇼가 36퍼센트 정도의 득표력이 없었을까. 결국 87년 12월의 노태우 당선은 그 거대한 항쟁을 일으켰으되 두 보수 야당 정치인의 단일화조차 이뤄내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의 패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김영삼처럼 그 패배를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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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에는 노태우 찍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노태우가 당선되느냐?” 는 주관적인 분노가 버젓이 정세 분석 문건에 오르는 가운데, ‘컴퓨터 부정설’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내가 대학 가서 처음으로 받은 ‘고대문화’ 28집의 서두는 그 ‘컴퓨터 부정’의 증거랍시는 TV 화면 캡쳐들이 장식하고 있었다. 시간은 경과했는데 득표수가 왔다 갔다 하고 김대중의 표는 되레 줄고 노태우의 표는 늘어 있더라 하는 등등이 ‘컴퓨터 부정설’의 근거였다. 그러니까 이에 따르면 선거 자체가 컴퓨터 속에서 기획되고 작성된 부정선거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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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걸 믿는 사람들은 정말로 철석같이 믿었다. 애초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함께 술 먹는 선배들조차 강력하게 그렇다고 우기니 ‘반신반의’ 모드로 접어들었는데 1988년 4월 25일 생판 엉뚱한 사건이 하나 터진다.

선거 전날 선거 방송 연습을 하던 제주 MBC에서 그만 그 과정을 송출해 버린 것이다. 즉 아무개 몇 표, 아무개 몇 표 등등을 입력하고 수정하고 하는 과정이 방송 전파를 탔다는 뜻이다. 마침내 증거가 나왔다!!!! 컴퓨터 부정설에 극히 회의적이던 나조차 흥분했다. “정말이었구나!” 이건 정말 데모할 일이다. 나도 이제 대학생으로 데모 한 번 해 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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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관 내에 도청 장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선배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입을 꼭 닫은 채 칠판에 530 명동이라고 쓰는 것으로 집결 장소를 알렸다. 다섯 시 반 명동....이라고 중얼거렸다가 지금은 공무원하고 계신 선배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그렇게 가투가 벌어졌고 내 동아리 동기 한 명과 선배 한 명이 잡혀갔다가 훈방됐다. 물론 훈계방면이 아니라 구타 후 방면이었지만. 그 시위에서 ‘아지’를 맡은 분 중의 하나가 까마득한 선배였던 허인회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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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하자마자 문무대 입소해야 했던 날,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1학년들에게 “저기 서관 유리창이 깨집니다. 줄을 멘 선배가 메가폰을 들고 내려옵니다......”하면서 80년대의 전설을 부르짖어 우리들의 넋을 빼 놓았던 그 선배가 내 앞에서 시위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결연했다. “내일도, 모레도 명동에서 만납시다. 이 부도덕한 정권의 숨통을 끊어 놓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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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선거는 탈없이 치러졌다. 그런데 당연히 컴퓨터 부정의 증거로 들이밀어져야 할 선거 결과가 드러나자 ‘컴퓨터 부정’은 자라목처럼 쑥 들어가고 말았다. 1당이야 민정당이었지만 김대중의 평민당이 제 1야당으로 부상했고, 김영삼의 통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민정당을 압도하며 여소야대를 이룬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명동에서 만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후속 시위도 없었다. 되레 ‘민의의 승리’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명동에서 부정선거 한다고 도로 점거하고 난리를 친 일원으로서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여 선배에게 이 내막을 캐물었을 때 선배의 답은 이랬다. “우리의 투쟁으로 컴퓨터 부정을 그만둔 게 아닐까?” 글쎄 그 답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는 각자 판단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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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로가 막힌 곳에서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고, 철석같이 기대했던 승부가 허망한 실패로 낙찰되었을 때 이른바 ‘멘붕’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음모론 역시 마약과 같은 성분이 있어서 한 번 맛들리기 시작하면 보다 더 자극적인 것에 끌리기 마련이고, 현실과 환각을 혼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멘붕 상태에서 사람들은 곧잘 눈 앞의 현실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또 그 믿음을 부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고, 급기야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벽에 부딪쳐 코가 깨지고, 자신과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상실해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