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김익상의 총독부 습격

in #kr6 years ago

1921년 9월 12일 풍운아 김익상 총독부 습격

어느 나라 역사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현대사에도 이 사람은 정말 영화 주인공이다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아리랑>의 김산, 일본 경찰 1천명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한 발로 자결한 김상옥, 일본 경찰이 그렇게 잡으려 애썼지만 끝내 잡지 못했던 의열단의 수령 김원봉 등등 허다할 테지만 그 가운데에 이 이름도 있다. 김익상.

그가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1922년에 스물 여덟이라 했으니 대충 1895년쯤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할 뿐. 그는 빈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철공소 견습생으로 살아가던 중 중국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는데 그의 꿈은 비행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의 비행학교까지 입교하지만 중국 내전이 치열해지면서 학교가 문을 닫아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그 꿈을 이루었다면 조선 사람들은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가 아니라 “김익상의 비행기”라고 노래했을지도 모르겠다.

김익상.jpg

하지만 그는 중국 북경에서 운명을 바꿀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의열단장 김원봉이었다. 조선 사람 팔할이 죽어서라도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이 혈기넘치는 독립운동가에게 김익상은 흠뻑 빠져들게 되고 그 투쟁에 동참할 것을 맹세하게 된다. 비행사를 꿈꾸던 청년에게는 곧 폭탄과 무기가 쥐어지게 된다. 의열단원들은 거사를 위해 떠나는 김익상에게 “장사는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싯구를 노래하며 배웅하지만 김익상은 태연자약했다. “1주일이면 돌아오리다.”

김익상은 그야말로 임기응변의 명수였고 “온몸이 간으로 된 것 같은” 사람이었다. 폭탄을 몸에 지니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 와중에 그는 옆자리에 앉은 일본 여인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검문을 피했다. 얼마나 정답게 대화를 했으면 일본 경찰이 홀딱 넘어갔을까. 경성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온 조선 사람이라면 일본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검문을 하던 무렵이었다. 김익상은 또 일본 여자가 데리고 온 3살 아이를 안고 어르면서 경찰의 눈을 피한다. 품 안에 폭탄을 지닌 채 어린 아이를 안고 화사하게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일본 경찰을 속여 넘긴 것이다.

김익상2.jpg

그리고 그 며칠 뒤인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쯤 지금의 남산에 있던 총독부 (구 중앙청은 세워지기 전) 2층에서 폭탄이 터진다. 경비가 삼엄하여 쥐새끼도 조선 쥐새끼는 얼신도 못했을 총독부의 심장부에서 폭탄이 터졌으니 그야말로 난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범인은 잡지 못했다. 득달같이 달려 올라오는 헌병들에게 “2층에서 폭탄이 터졌소 위험해요! 위험하단 말이오!”, 일본 말로 “아브나이! 아브나이!”를 외치며 빠져나가던 전기수리공이 바로 김익상이었던 것이다. 일제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이렇게 대담한 행동을 귀신도 모르게 하고 도망갔단 말인가. 김익상은 일본 요릿집에 숨어들어가 대장장이 옷을 훔쳐 입고 경의선을 탄다. 신의주에서 검문을 받았지만 “난 오사카에서 온 일본 사람”이라면서 또 경찰을 속여 넘긴다. 그리고 정말로 1주일만에 중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정체는 다음 해에야 밝혀진다. 총독부 공격 실패를 한으로 삼아 다른 목표물을 찾던 중 일본군 대장 다나까 기이치가 상해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김익상은 오성륜, 이종암 등 동지들과 함게 다나까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다나까가 상해에 왔을 때 상해 부두는 초만원이었다. 일본의 환영객들도 많았고 당시 국제도시 상해에는 외국인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그 혼란 속에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총과 폭탄을 숨기고 서 있었다.

김익상3.jpg
다나까 기이치

다나까가 도착하고 인사를 나눌 때 오성륜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그러나 그 순간 유감스럽게도 총탄은 마침 다나까 앞을 지나가던 영국인 신혼부부 중 아내의 몸에 명중하고 말았다. 즉사였다.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다나까의 경호원들이 다나까를 차에 태운 순간 김익상이 나서 방아쇠를 당겼다. 겨냥은 정확했지만 총알은 다나까의 모자를 맞췄다. 그리고 던진 폭탄도 불발이었다. 세 번째 나선 이종암도 실패했으니 다나까 기이치라는 사람은 참 명이 길기도 길었다. 그는 일본 수상까지 지내고 1929년 죽는다.

김익상은 몸을 피하지만 아내의 죽음에 눈에 불을 켠 영국인의 추격을 받고 그 총을 맞은 채 체포된다. 체포된 뒤 그는 그의 대담함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 모진 문초를 받고 압송되는 와중에도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서 일본인 간수들을 놀래켰을뿐더러 일본에 압송됐을 때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하이칼라’ 머리에 검푸른 양복에 레인코우트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는 일본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하며 결기를 돋우었다.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 김익상, 제3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무리 문화 정치(文化政治)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나의 이번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소.”

쫓아오는 중국 경관에게도 총을 쏘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김익상은 이렇게 대꾸한다. “상관없는 중국인을 죽일 이유가 없지. 하늘을 대고 쐈소.” 그러면서 빵 빵 손가락총을 쏘는 시늉을 하자 방청객에서 웃음이 터질 정도였다. 하지만 “다나까 대장이 총을 맞았으면 폭탄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냐?”는 질문에 “아니오 맞았더라도 폭탄을 던졌을 거요.”라고 대꾸했을 때는 아마 아무도 웃지 못했을 것이다. 김익상은 요즘 말로 그런 ‘상남자’였다.

김익상은 처음에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20년 감형을 받았고 1942년 석방된다. 그러나 일제는 이 위험한 상남자를 그냥 두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익상의 최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를 두고두고 감시하던 일본 경찰과 함께 어느 날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주위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남산에 있는 김익상 의거 안내석 하나 밖에 없다. 아마 김익상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분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가 우리 역사에 있었고 그런 사람이 있음으로 결국 우리가 있는 건 분명하다.

Sort:  

Source
Plagiarism is the copying & pasting of others work without giving credit to the original author or artist. Plagiarized posts are considered spam.

Spam is discouraged by the community, and may result in action from the cheetah bot.

More information and tips on sharing content.

If you believe this comment is in error, please contact us in #disputes on Discord

김익상,,,, 정말 영화 같은 삻을 산 멋진 분이시군요.
잘 알려지지 않은 위인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왜 아직 영화로 안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죠

상남자네요. 멋있네요. 저도 저렇게 결기있게 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되시리라 믿어 의심지 않겠습니다

이름을 알지못하는 많은 독립투사들이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요즘보는 미스터션샤인을 잘보고 있지만
여러가지 방법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어우 미스터 선샤인은.... 너무 판타지적이라.. 어쨌든기억ㅎ 이름없이 공도 없이 나라 위해 애쓴 분들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