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할머니

in #kr7 years ago

<리얼코리아>라는 프로그램을 할 때의 일입니다.

서울에서 오래된 맛집을 찾아 성북구 장위동의 한 해장국에 들렀습니다. 해장국집의 특성상 촬영을 새벽 4시에 시작했고, 첫 손님은 5시쯤 들어왔습니다. 대개 이 시간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인터뷰를 거칠게 거절하는 경우가 많아 조심조심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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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거 <비터팬의 식도락>

"무슨 일로 밤 새셨나요?"

"아니오. 잠 자다가 새벽에 눈 뜨면 이 해장국 생각이 나는 거라, 그러면 옆에 마누라 몰래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서 옷 주섬주섬 입고 나와 이리로 오는 거예요. 허허허."

아침 댓바람에 무엇이 그리 좋은지 마냥 싱글벙글이십니다. 그래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었죠.

"이 집 촬영하는 거 아뇨? 우리 할머니 손님 많이 오면 돈 많이 벌 거 아냐? 껄껄껄."

"우리 할머니? 혹시 가족이세요?" (식구들을 손님으로 동원했단 말인가? 이런...)

"푸하. 아니에요 내가 할머니 닮았수? 그건 기분 나쁜데. 이 동네 사람들은 다 할머니 가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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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가족같이 대하는 걸 신조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식당들은 시골 밤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만, 손님들 스스로가 '한가족'임을 증명하는 식당은 기실 서울 밤하늘의 별처럼 드뭅니다. 이 집은 그 몇 안되는 별 중 하나였습니다.

아침이 밝은 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식당 문을 밀치고 들어온 많은 손님들 중 단 한 명도 제 카메라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제 집에 온 카메라를 반기듯 반색을 했고 서로 말을 해 주려고 덤볐습니다. 할머니 집이 텔레비전에 나온다니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식당 촬영한 이래 한 번도 인터뷰를 거절하는 손님이 없는 집은 이곳이 유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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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블로그

이 화목한 공간의 중심에는 40년 동안 새벽마다 가마솥 두 개 가득 해장국을 끓여내온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고희를 훨씬 넘긴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불을 지폈고, 선지와 우거지를 손질하고 겉저리를 담으셨지요. 할머니는 음식을 내 간 다음,반드시 홀로 나와 손님들을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입버릇처럼 물었지요.

더 드려요?

밥 안모자라요?

어떤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할머니, 내가 돼지요?"라고 웃을만큼 해장국의 양은 많았습니다. 국물 위의 선지는 '담았다'기보다 '쌓았다'는 표현이 어울렸구요. 예전 이웃집에 갔을 때 밥 먹고 왔다고 해도 무조건 밥상머리에 앉히고 밥 공기를 내밀던 친구 할머니처럼, 할머니는 식탁 주변을 서성거리며 모자라는 밥그릇을 챙겼습니다. 조금은 오버다 싶은 마음으로 할머니께 왜 그렇게까지 하시냐고 여쭈었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힐끗 바라보시더니, 철없는 손주 나무라듯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밥 한 그릇에 눈물 나는 수가 있어요. 나도 옛날엔 그랬고, 그러니까 더 드시라는 게지. 요즘은 밥 한그릇에 눈물 흘릴 사람 없을 것 같아요? 아니에요 있어요. 없지는 않아요."

할머니 역시 밥 한 그릇에 눈물을 흘리신 분이셨습니다. 전쟁과 피난(고향이 이북이셨지요), 그리고 일찍 돌아간 남편 대신 감당해야 했던 세상살이의 귀퉁이마다 밥 한 그릇과 바꿨던 눈물들이 맺혀 있었지요. 누군가 그런 귀띔을 해 주더군요. 저 할머니는 평생 퍼머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뭣하러 머리에 돈 들이냐며 그냥 쪽짓고 비녀 꽂고 살았다고, 자기한테 그렇게 박하면서 남한테 후한 할머니는 없을 거라고.

국민소득 몇 만불이 어쩌고 하는 세상이라지만 요즘 우리는 마트에서 분유를 훔친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돈 만 원을 빌리기 위해 옆집 문을 두드리며 살다가 세상과 처참하게 이별했던 일가족의 사연에 말문을 잃습니다. 평생 퍼머값이 아까와 비녀 하나로 머리손질을 끝냈을지언정, 밥 한 그릇에 눈물 나는 수가 있다는 심정으로 손님들의 밥 먹는 품을 세심하게 지켜보던 할머니의 마음을 그 반에 반만이라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더라면 그 슬픔들은 줄어들 수 있지 않았을까요?

내 배가 부르다고 모두가 배부를 줄만 알고, 내가 이만큼 사니 다들 웬만큼은 살 것 같고, 떼돈 버는 놈들 보면 배아프지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은 뭘 어떻게 먹고 사는지 관심이 엷어지는 요즘 세상에서 할머니의 예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해장국집 방송 1년 뒤, 다시 해장국집에 들렀을때 저는 천만뜻밖에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새벽 손님을 접대하시고 잠깐 주방 옆 골방에서 눈을 부치겠다고 들어가셨는데, 그예 잠자듯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수십년 시장 골목에서 맛있는 해장국으로, 또 마르지 않는 마음으로 손님들을 감싸 안았던 할머니였기에, 하늘은 마지막 선물로 그렇게 편안한 이별을 내리셨나 봅니다. 할머니를 지금 떠올리건대 가마솥 앞 의자에 무표정하게 앉아 해장국을 푸던 그분의 얼굴에는, 그리고 낡은 비녀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빛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모이고 뭉쳐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고 온기를 불어넣는, 작지만 아름다운 사람의 별빛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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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고 들어오니 해장국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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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가신 곳에서 편안하시길....
밤이라 센티해진건지 눈물이;;
오늘도 이야기 함께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홍보해

감사합니다.... 그분 가는 길 편안하셨길.....

Nice post I like it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잔잔한 감동이네요... 보팅&팔로우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 푸근하셨기에 그 푸근함과 따듯함을 돌아가시고 나서도 가슴 속에 안겨주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네 할머니 찾아갔을 때 돌아가셨다는 말 듣고 제가 다 마음이 헛헛하더라구요.

술먹고 들어오셨는데 이리 글을 잘쓰시면 반칙입니다^^~

죄송하지만 ^^ 예전에 쓴 글입니다.... 생각이 나서 길어 왔습니다 ㅋ

죄송할꺼까진ㅋ 오늘하루 좋은하루ㅋ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같습니다. 요즘에도 저런 인심이 후한 집이 있을까 싶네요. 맛집은 많아졌다고는 하지만요.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네 감사합니다...

본듯한 해장국 집이네요 ~~ 푸짐 하네요 ~
할므이 좋은 곳으로 가셨을겁니다 .

그러리라 믿습니다.... 가게도 어디로 이전했다던데 아직도 풍성한 해장국으로 새벽 손님들 속을 달래 주고 있으시겠죠

사진으로만 봐도 푸짐한게 느껴지네요! 사장님께서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빕니다.

고인의 명복을 함께 빌어 봅니다.......

@sanha88님 안녕하세요. 여름이 입니다. @wonderina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