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과 제주도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제주도 해병대
지금도 인천 자유공원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동상이 서 있다. ‘20세기의 시저’부터 ‘덕아웃의 더글라스’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때 본부에 칩거하여 움직이지 않았던 데서 유래)까지 매우 다양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며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그 후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미국 군인은 1950년 9월 15일 그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전 중의 하나를 개시한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의 간만의 차가 세계적으로 심하고 서울에 가까워 인민군의 방어도 강력할 것이라는 반대도 치열했지만 이 고집 센 별 다섯 개짜리 장군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천을 고집했다.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느라 죽을둥살둥하고 있던 미군과 국군에게도 인천 상륙 작전이란 그렇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워커힐 호텔로 그 이름을 서울의 한 지명으로 남기게 되는 미 8군 사령관 워커만 해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미군의 가장 강력한 원투펀치라 할 해병대를 전투에 참가시키지 말라는 맥아더의 명령이 너무 갑갑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낙동강 전투는 그다지 신경을 세우지 않았고 오로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의 뒤통수를 때릴 연구에 골몰하고 있었으니까.
기실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가 뛰어나서 성공한 것이라기보다는 김일성 이하 북한 지휘부의 무능과 안이함 탓이 컸다. 사실 무모한 작전이었고 맥아더가 서울 수복에 집착한 덕분에 북한군은 괴멸에서 벗어나 북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이 상륙작전에 맛들인 나머지 원산 상륙 작전을 벌이게 되는데 항만에 깔린 기뢰를 청소하는 동안 한국군이 먼저 원산을 점령해 버려 닭 쫓던 개 꼴이 된 일로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인천 상륙 작전은 함정 261척, 병력 7만 5천명이 동원된 대규모 상륙작전이었다. 한국군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15척의 한국 해군 함정과 함께 해병대가 그 주력이었다. 특히 해병 3기와 4기가 한국 해병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지역적 특징이 하나 있었다. 거의 전원이 제주도 출신이라는 점
1948년 4월 3일 일어난 4.3 항쟁의 여파가 어떤 식으로 제주도를 휩쓸었는지는 따로이 할 얘기가 없을 것 같다. 하여간 수십만 명의 목숨이 죽어나간 세월이 여전히 독살스러웠던 무렵 1949년 12월 한국 해병대가 제주도로 온다. 공비 토벌은 토벌대로 하면서 해병대 양성소로서 제주도를 점찍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 6개월 뒤 전쟁이 터진다.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제주도민들에게 해병 입대를 권유하게 되는데 그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일단 해병대 사령부는 기존에 4.3을 진압한 부대나 서북청년단과는 다르게 행동했고 대민 지원 사업이나 ‘대국민 심리전’을 원활하게 활용했다. 사령관 스스로 “아버님 어머님”을 부르며 도민들을 만났고 4.3의 여파로 초토화된 제주 일원의 복구에도 힘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일찍이 좌익세 충만했던 제주도가 일순간에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의 병력 모집 광고가 나가자마자 수천 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나이가 어린 중학생들은 혈서를 써서 꼭 군대에 가겠노라고 고집을 부렸고 형제들이 몽땅 입대해 버리자 어머니가 목을 놓아 우는 광경도 벌어졌다. 3기 1661명 4기 1277명.
가장 큰 이유는 역시 4.3이었다. 혈서를 쓴 사람을 비롯하여 열혈지원자 가운데에는 어찌 어찌 4.3의 봉기 세력과 연관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니 그 좁은 섬에서 좌익 세력과 얽히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해병대 입대란 자신의 몸과 가족들 전체의 이름에 찍혔을지 모르는 낙인을 지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당시 제주도 출신 해병대들은 학력도 높았다. 당시 제주 출신 해병대를 지휘했던 공정식 장군은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국군들의 학력이 높지 않았던 시절 제주도 출신들은 영어도 할 줄 아는 엘리트들이었다.”
육지 출신들은 낫 놓고 기역 자 모르는 문맹들이 주로 최전방에 서고 죽을 때 빽이 없어 죽는다고 “빽!”을 부르짖고 죽었다지만 제주도에서는 최선의 인재들이 해병대의 선봉에 서야 했다. 그들은 최초로 통영 전투에 투입됐고 거기에서 승리한 뒤에는 바로 인천으로 투입된다.
이후 그들의 활약을 보면 영화같은 장면도 등장한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 <윈드 토커>에는 나바호 족 인디언들만의 언어를 활용하여 암호 체계를 구축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바로 제주도 해병대는 제주도 사투리를 통해 통신 체계를 쓰기도 한다. 무선 통신이 죄다 인민군에게 감청되는 것을 안 지휘관이 통신병이 죄다 제주 출신임을 감안, 제주 사투리로 통신을 시도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 “뭐라는 거이가?” 인민군들은 제주도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런 배경으로 제주도 출신들이 주력을 이룬 한국 해병대는 연희고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서울 시내로 돌입하고 시가전 끝에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게 되는데 이때 태극기를 올린 3인의 해병 중 1명도 제주도 출신 양병수였다.
그들이 “귀신 잡는 해병”으로 명성을 떨쳐 가는 동안 제주도에서는 그전보다는 덜했지만 ‘공비 토벌’이 계속돼고 있었다. 워낙 토벌이 혹독했고 각종 훈련소도 제주도에 많이 설치돼 있었기에 제대로 활동은 못했지만 ‘공비’들은 남아 있었고 1952년에는 방송국과 발전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자 당국은 또 강력한 토벌전을 전개했고 이 와중에 민간인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제주에서 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로 훈장을 받고 포상 휴가를 받아 제주도로 돌아온 해병대원들이 살해된 부모들 앞에서 넋을 잃고는 난동 끝에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절규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뭣 때문에 싸웠는데. 내가 뭣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는 분명히 한국어는 한국어이되 다른 지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로 “도루멍 도루멍 올라갑서” 라거나 “어 보름 참 많이 분다.” 라고 얘기하면서 M1 소총을 굳게 쥐고 있던 사람들이 수천 명 몰려들어 있었다. 용감했지만 그 용기의 원천이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었던 수많은 사연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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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찡한 한마디네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는...
가슴 아픈 역사가 없는 데가 없습니다 한반도는... 그야말로 백두에서 한라까지
같이 하숙했던 후배가 생각납니다. 고향집에 전화할 때만 처음 듣는 외계어를 떠들어 대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