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하여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기념일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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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가 된 매 이츠하크 라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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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후반을 지구상에 발 디디고 살아야 했던 인류 가운데 가장 운이 나쁜 부류를 꼽으라면 다윗의 후손들도 한 자리 들어갈 것이다. 물론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멸망시킨 이래 2천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시온의 나라를 되찾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이는 곧 아랍인들의 처절한 분노와 슬픔이라는 동전의 뒷면이었고 그 땅은 피어린 공격과 방어, 끔찍한 학살과 절망적인 봉기가 끊이지 않는 비극의 무대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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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고도 암담한 다툼의 시작에서부터 등장하는 이츠하크 라빈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흡사 '전투 중 막간 행사'와 같았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고 그들의 환희의 송가인 '하티크바'를 부르는 순간에도 아랍 연합군의 포탄이 독립 선언 장소 근처에 떨어졌고, 이스라엘의 국기 다비드의 별을 예루살렘의 쓰레기 하치장으로 보내겠다는 아랍 연합군은 예루살렘 포위를 끝내 놓고 있었다.
그때 이츠하크 라빈은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의 여단장이었다. 지금도 이스라엘 정부가 파괴된 전차와 차량, 녹슨 대포 등을 놔 둔 채 전쟁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열 서넛 먹은 소년병들까지 투입해 가며 아랍군의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 부족한 탄약과 빈약한 무기를 들려 병사들을 죽음을 향해 내보내면서 우리는 맹세했다. 다시는 다시는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우리의 조국이 이렇게 대책 없이 당하게만 하지는 않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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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국이 뉘 땅에 선 것이며, 대체 그 땅의 임자가 누구였으며 라빈의 저 말이 그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맹랑하게 들릴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자. 어쨌건 이스라엘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스스로의 독립을 지켜냈고, 아랍국들은 한 식경이면 예루살렘 성벽에 초승달 기 꽂고 알라께 기도할 줄 알았다가, 큰코를 다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서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전투의 종식이 아닌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툭하면 재개되는 숙명의 대결장에서 이츠하크 라빈의 이름은 항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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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6일전쟁에서 그는 참모총장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가자 지구' 등 요단강 서안 지역을 장악하고 동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수천년의 한이 서린 통곡의 벽과 드디어 마주하게 된다. 동예루살렘 점령 소식을 듣자마자 평생의 전우였던 모세 다얀과 더불어 득달같이 달려갔던 라빈은 이 날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다.
오른쪽이 참모총장 라빈, 가운데 안대한 사람이 다얀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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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서 테러리스트들이 여객기를 납치해서 우간다의 앤테베 공항에 내린 것을 완벽한 기습으로 제압, 최소한의 희생으로 작전에 성공하여 이스라엘의 위명을 세계에 떨쳤을 때 라빈은 총리였다. 이른바 기념비적인 사건마다 그 이름이 아로새겨진 최우등급의 전쟁 영웅이라고나 할까. 단지 그것 뿐이었다면 편안한 침대 위에서 그는 국민들의 애곡을 받으며 "이스라엘이여 영원하라" 정도의 유언을 남기면서 종생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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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전쟁으로 영웅이 되었지만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그 전쟁의 먹잇감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올라선 전쟁 영웅의 무대는 수만 젊은이들의 생명으로 쌓아올린 제단(祭壇)임을 통감하는 사람이었다. 후일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의 연설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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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한 젊은 남녀들이 나의 책임하에 오히려 죽음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려다 죽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지휘관으로서 국방장관으로서 나는 수많은 군사작전을 명령 했습니다. 승리의 기쁨, 사별의 슬픔과 함께 나는 언제나 그런 결정을 내린 직후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고위 장교들이나 내각의 각료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날 때의 그 정적, 문 밖을 나서는 그들의 뒷 모습, 문 닫히는 소리, 그리고 홀로 남은 나를 감싸는 적막, 그 때가 바로 금방내린 결정으로 우리 국민들이나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죽음의 길로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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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그들은 여전히 웃고 있으며 여전히 이러 저러한 계획을 짜고 사랑을 꿈꾸며 여전히 정원에 나무를 심거나 집을 지을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그들중 누가 죽을 운명일까요, 누구의 사진이 내일 신문에 검은 태를 두르고 나타날까요, 누구의 어머니가 곧 슬픔에 잠기게 될까요, 어느 진영이 패배로 신음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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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열 아홉에 총을 들었고 평생을 아랍인들과 팔레스타인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 왔던 전쟁 영웅은 이렇게 전쟁의 본질을 토로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의 평생의 사명은 승리와 생존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바뀌어 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함무라비 법전이 살아 숨쉬는, 아니 한 개의 눈에는 백 개의 적의 눈, 한 개의 이에는 천 개의 이로 대응하는 난폭한 군신의 규율이 난무하는 땅에서 이츠하크 라빈은 신기루처럼 다가설 수 없던 평화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건 철천지원수를 설득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평생의 전우를 적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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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자살을 하기로 결정한 미친 정부" 이스라엘 극우 강경파의 비난이었다. "테러조직과 공모한 자들"이라는 독설도 쏟아졌다. 이스라엘 최고의 전쟁 영웅 이츠하크 라빈에게 말이다. 하지만 드디어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이 마무리되던 때 라빈은 실로 후련한 연설로 피비린내났던 그의 과거와 결별하고자 한다. 그가 전쟁 영웅이기 때문에, 그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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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여러분들과 싸워온 우리(이스라엘)는 오늘 이 자리에서 크고 선명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피와 눈물은 지금까지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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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감동적인 선언이면서 한맺힌 질문이기도 했다. "더 필요한가? 더 많은 피와 눈물이 필요한가? 그렇게 서로 싸우고 죽이고 찌르자고 '크고 선명하게' 외치고 싶은가?"
1995년 11월 4일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서 열린 평화 집회에 참석한다. 5만 명을 예상한 집회에는 25만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테러의 위협에서 한 시도 자유롭지 않고 여자도 병역의 의무를 마쳐야 하는 이스라엘에서는 자위를 위한 총기 보유가 어렵지 않다. 아니할말로 마음만 먹으면 품에 총 넣고 인파 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날 뿐 아니라 암살 우려는 항상 제기되어 왔지만 라빈은 이렇게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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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이 유태인을 죽일 리 없다." 영국군, 프랑스군, 이집트군,요르단군, 시리아군의 그 모진 총탄으로부터도 살아남은 내가 유태인의 손에 쓰러질 리가 있겠는가 하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잊지 못할 연설을 한다.
"제가 싸움을 하던 시절에는 평화를 향한 기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믿습니다. 엄청난 기회입니다.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 기회입니다. 폭력이 이스라엘 민주주의의 기초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은 거부되고,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이스라엘 앞에 고통 없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길은 전쟁의 길보다는 낫습니다. 저는 이스라엘군 가족들의 고통을 보아온 군인으로서, 또 국방장관으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포괄적인 평화를 얻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스라엘군 가족들과 우리 아이들, 그리고 손자들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
눈물이 찡하지 않은가. 왜 우리의 전쟁 영웅 가운데에는 이런 분이 없는 것인가. 왜 철천지원수를 몰라보는 젊은 세대의 '안보의식'만 걱정하고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지 않으면 역적 취급에 종주먹질만 나가는 '어버이연합'만 난무하는 것인가. 하지만 역시나(?) 이스라엘에도 우리나라의 어떤 부류들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 인간들이 있었다.
환호하는 시민들과 악수하며 지나던 라빈에게 총을 든 대학생이 뛰어들었고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일흔 네살의 전쟁 영웅이었으며 이제는 평화의 사도로 우뚝 섰던 한 거인은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등을 다쳤소. 그런데 심각하지는 않아요." 그의 유언은 역시 수십 년 전장을 누비며 삶과 죽음을 오갔던 노병다왔다. 하지만 그가 연설 후 함께 불렀고 그 가사를 적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노래의 가사는 그의 최후를 평화주의자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아침해를 맞으며/평화의 노래를 부릅시다/기도의 속삭임이 아닌/
평화의 노래를 부릅시다/ 우렁찬 목소리로/평화의 날을 기다리지만 말고/그날을 향해 나아갑시다
1995년 11월 4일. 비둘기가 된 독수리 이츠하크 라빈이 정말로 파란만장했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사후 평화는 더 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은 "그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전쟁을 치른지 60년이지만 아직도 그 전쟁의 악몽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이라는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나라 백성의 처지에서, 그의 마지막 노래는 마음 속 공감의 북소리가 크다. " 평화의 노래를 부릅시다/ 우렁찬 목소리로/평화의 날을 기다리지만 말고/그날을 향해 나아갑시다"
피를 피로 씻고 눈물을 눈물로 씻어내던 나날들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네.... 동의합니다.. .그리고 무플 깨쳐 주심에 감사합니다.... 요즘 스팀잇 계신 분들께 제가 뭘 잘못했나 싶을 만큼 무플도 생기고 추천도 없어서 기가 죽는 참이었습니다 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산하님의 포스팅에 담긴 감정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하루 두개 다 읽으면 진이 빠져서일 겁니다. 이글루스에 올라온 글이 모두 사라져서 망연자실한 차에 여기에서 다시 시작한 걸 보고 참 기뻤는데 ㅎㅎㅎㅎㅎㅎㅎ 글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산하님 포스팅 두 개면 조금 무거울 겁니다. 어차피 블록체인의 시간은 기니 하루 하나씩 천천히 가셔도 될 듯 해요.
나중에 @shiho님 같은 기자분들과 한번 자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 위스키는 좋아하시는지요 ㅎㅎㅎㅎ
없어서 못먹죠 ㅋ
감사합니다
어잇쿠 @lekang님이 언급해주신 김에 간만에 인사드려요. 할아버지 돈가스 엄청 맛있더라구요. 페북에서도 잘 보고 있습니다. 뭔 말만 하시면 누군가 싸우자고 달려드는 페북. ㅋㅋㅋ
감사합니다 ^^ 여기서는 매우 조신하게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