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왜 사는가 고민 마라, 시시포스처럼 안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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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절대의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게 그렇게도 반가운 일일까? 의미가 있다는 것은 내 삶에 목표와 용도가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용도가 있으면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의 인생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무언가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나는 망치고, 망치이기에 벽에 못을 박아야만 한다. 의미 있는 인생이란 결국 존재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나만을 위한 인생은 인생에서 절대의미를 뺀 후부터 가능해지게 된다.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순간에야 우리의 존재는 가벼워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가벼운 인생은 쿤데라의 유명 소설에서 표현했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다.

명예와 부를 모두 누리게 된 레비는 아마도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왜 그 많은 젊은이 중에 자신만 살아남았을까? 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던 날 자신은 살고 옆에 서 있던 귀여운 여자 아이는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학살당해 한줌의 연기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왜? 왜? 왜? 레비는 1987년 4월 11일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답이 있을 수 없는 ‘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40년 전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죽기 시작했었던 것이다.